당신의 젊음이 영원할 수 없듯이 당신의 동반자들, 예를 들면 컴퓨터, 휴대전화, 텔레비전, 선풍기, 오디오, 소파, 영국 갔을 때 산 예쁜 색깔의 블라우스, 친구가 선물로 준 명함지갑, 모두 언젠가 낡는다.
그중 하나가 통돌이 세탁기. 친구가 2011년 이사 선물로 보내줬다. 세 번의 이사를 하고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리고 정말 잘 돌아간다. 문제는 ‘연결부위’다. 어느 날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이것이 나중에 ‘대하’가 될 줄은, 이를 해결하는 여정이 ‘대하소설 대장정’이 될 줄은 몰랐다. 일단은 언제나 틀어놓았던 물을 잠갔다. 물은 똑똑 여전히 떨어졌다.
일요병에 시달렸다. 빨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요일 오후는 우울했다. 세탁기로 들어가는 물 반, 떨어지는 물 반. 집을 방문한 형부는 천을 걸어 밑에 받쳐놓은 찜통으로 물이 떨어지게 했다. 그나마 나았다.
드라마 <굿닥터>(2017)의 숀이 동생과 함께 살던 집의 수도꼭지 물이 샌다. 물소리에 숀은 잠을 못 이루다 스크루드라이버를 찾아나선다. 여기저기 고쳐야 할 게 많다. 건물관리인에게 고칠 목록을 건네준 다음날 보니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실은 숀은 옛날 집과 수도꼭지 물 떨어지는 속도가 달라 조정하려는 것이었다). 건물관리인이 단숨에 고친 것으로 보아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스크루드라이버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수리기사에게 전화했다, 가 끊었다. “혼자 해보자. 기껏 수도꼭지인데.” 이런 결심을 한 것은 지금 사는 전셋집이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아서 ‘유지보수’의 근력을 키워야 해서다.
넘쳐나게 수납장을 만들어놓은 이 집의 전체 인테리어를 한 것은 아마 10여 년 전일 듯하다. 정말 나무처럼 보이는데, 단지 겉을 잘 싸놓은 시트지라는 것은 문지방과 문기둥에서 알 수 있다. 장대비가 오면 뒷베란다에 물이 조금씩 샌다. 샤워실 문의 아래쪽 물막이가 어느 날 툭 떨어졌다. 침대를 세워 옮기다 그냥 부딪혔을 뿐인데 전구등이 툭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램프용전자식안정기’의 제조연월을 찍어보니 2006년이다. 바로 그해 이 집이 지어졌다. 보일러 역시 ‘설치일 2006년’이라고 쓰여 있다.
한국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은 15년이 지나면 제2종(15층 이상), 제3종 시설물로 분류돼 점검 대상이 된다. 아파트 자체가 기대수명이 40년이다(그에 견줘 유럽의 집은 120년이다). 아파트가 그러한데 속의 것인들 어떠랴. 15년을 견딘 게 용하다. 인테리어 할 사정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고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집에 대니엘 브룩스(오래된 주택을 하루 만에 개조하는 프로그램인 넷플릭스 시리즈 <리모델링 임파서블>의 진행자)가 찾아올 것도 아니고.
‘유지’ 여정의 시작은 문고리였다. 집에 이사 온 날 화장실에 갇혔다. 다행히 언니와 형부가 집에 있었지만, 화장실 밖에서 톱으로 문고리를 다 끊어낸 뒤에야 나올 수 있었다. 다른 문고리 역시 작동이 위험해 손봐야 했다. 문고리를 갈아끼기는 쉬웠다. 문 사이에 물리는 버튼의 안쪽과 바깥쪽만 바꿔 넣지 않는다면. 나사를 열심히 돌리니 등에 땀이 잘게 배었다. 일을 마친 뒤 보리차 한 잔은 참으로 시원했다.
수도꼭지를 고치기 위해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수도꼭지 속 고무패킹! 학교 ‘실과’ 시간에 들은 것 같다. 인터넷 조사 결과 500원 정도(10개에 4200원) 한다는데, 인터넷 주문을 하기가 미안하다. 철물점만 가면 된다. 집보다 철물점 영업시간에 더 있게 되는 회사 앞의 철물점은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전화를 걸고 문자를 남겨도 콜백은 오지 않았다. 많은 물건이 걸린 가게 유리에 코를 박고 안쪽을 살폈다. 저기 고무패킹이 있을까. 일찍 퇴근한 어느 오후, 집 근처 철물점에 갔다. 그냥 진리인 걸까. 철물점 주인은 언제나 ‘출장 중’이다. 전화를 걸었더니 “언제 있을지 모르니 전화하고 오라”고 한다. 버스를 타고 다른 철물점에 갔다.
나이 지긋한 철물점 주인은 휴대전화를 스피커폰으로 해놓고 부품을 주문하고 있었다. 물이 새는 모습을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주인은 수도꼭지 밑의 커플링을 갈면 되는데 그것만은 안 파니 수도꼭지를 사라고 한다. 집에 있는 것은 ‘두 갈래 수전(수도꼭지)’인데 2만원이라고 했다. 나는 패킹을 사러 왔을 뿐인데.
커플링은 인터넷에선 팔았다. 2개에 8천원 정도였다. 도착한 커플링을 감아봐도(집에 있던 공구상자의 스패너를 사용했다) 물은 커플링 위로 솟았다 아래로 솟았다 했다. 물 새기 시작한 뒤로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교체해보기로 했다.
집에 있는 두 종의 펜치로는 수도꼭지를 비틀어 빼낼 수 없었다. 검색해보니 이름에도 ‘워터’가 있는 ‘좋은 예감’의 도구가 있었다. 다이소에서 워터펌프 플라이어(첼라)를 구매했다. 유튜브에서 ‘수도꼭지 교체’를 검색하면, 꼭 ‘여자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운’이라고 제목을 달아놓았다. 나는 왜 못할까. 수도꼭지를 돌려야 하는데, 미끄러진다. 첼라로는 돌릴 만한 마찰력을 찾을 수 없다. 힘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또 다른 도구의 힘을 빌려야 할 것 같다. 아, 뭐니 뭐니 해도 전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제일 쉽다.
“기사님, 수도꼭지까지 사놨는데요, 언제 가능하실까요.” 출장기사는 수도꼭지 하나든 두 개든 출장비는 똑같다며 6만원이라고 하신다. “악!” 충동적 결심은 6만원 산만큼 높지 못했다. 그냥 하자. 또 어느 유튜브에서 보고 파이프렌치를 주문했다.
똑똑똑, <굿닥터> 숀이 그리워한 물방울 떨어지는 주기는 이것이었을까, 또르르륵 이것이었을까. 집안에 계속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일요일, 수도꼭지에 세탁기 호스를 연결하면서 ‘입틀막’(입구를 틀어막다)을 위해 테프론을 여러 겹 쌌다. 테프론은 구입한 수도꼭지에 동봉돼 있었다. 그런데 웬일이니. 물이 새지 않는다. 내 입을 틀어막았다. 테이프로 막을 것을 파이프렌치까지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도꼭지 리뷰에 수도꼭지를 달고 나서도 물이 흘러서 테프론으로 감아서 완료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이제 고요를 되찾은 방에 누워 또 ‘수도꼭지’를 검색해보면서 “‘수도꼭지’를 교체해야 하는데 이 중 어떤 공구를 쓰면 될까요?” 하는 글에 댓글을 달 뻔했다. “테프론 테이프는 감아보셨나요?”
집 안의 물을 어디서 잠그는지 아는가? 나는 여러 번 복도에서 물 잠금장치를 돌려보았다. 힘도 없고 기술도 없는 걸 확인하고, 쓸데없는 것을 사고(다 합쳐도 6만원이 안 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헛발질했지만 집을 더 잘 알게 됐고, 안 만큼 더 좋아하게 됐다.
볼프강 헤클은 “사랑에 빠졌을 때, 맛있는 커틀릿을 먹을 때, 로또에 당첨됐을 때”와 같은 행복감을 “수리를 성공적으로 끝냈을 때” 경험할 수 있다(<리페어 컬처>)고 한다. “완전히 일에 집중하게 되고, 낙관적으로 바뀌며,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유지’를 위해 몇 가지 일을 더 했다. 집 붙박이장에 여러 곡절을 거쳐 선반을 달았다(붙박이장 시공업체는 사후 추가 시공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골칫거리였던 뜨개실 콘사(기다란 콘 모양의 심지에 감은 실)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재봉틀로 옷을 여러 개 기웠고, 샤워부스 문에서 떨어진 물막이를 접착제로 붙였다. 그 전에 노랗게 변색된 물막이에서 15년 묵은 때를 떼어냈다.
손을 움직이라. 파악(把握)에 모두 손(手)이 들어가듯이 손을 움직이면 뇌가 움직인다. 이마누엘 칸트는 “손은 마음에 이르는 창문”이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리처드 세넷은 이 생각하는 손을 잃어버린 것이 현대문명의 파괴적 현실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장인>). 어느날 붙박이(빌트인) 식기세척기가 이상 조짐을 포착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관련 기사 : '보수주의자'가 되자 - 유지보수의 친구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26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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