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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자연에 반성문을 쓰는 과학저술가 [21WRITERS②]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쓴 최재천 작가 인터뷰
등록 2022-03-22 17:30 수정 2022-03-28 18:27
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사진=김진수 선임기자


*최재천, 시인의 마음으로 과학을 쓰다 [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

과학자가 나서서 과학을 알려야 한다

-지금껏 수많은 글을 집필했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점이 어려웠는지요? 또한 그 어려움을 극복한 나름의 노하우는 무엇인가요?

유학 시절, 내가 쓴 논문을 읽고 교수가 던진 말이 있었습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쓴 글이었는데 교수는 대뜸 내게 “왜 논문을 시적으로 쓰느냐”고 지적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바가 있었죠. 글쓰기도 갈래가 있습니다. 논문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글쓰기와 시나 소설로 대표되는 문학적 글쓰기는 서술에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르거든요. 과학적 글쓰기는 두괄식으로 결론을 먼저 제시한 뒤 간결하고 명확하게 사실을 기술한 문장으로 결론을 뒷받침하는 게 미덕이지만, 문학적 글쓰기는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을 살리며 기승전결 구조를 통해 결론은 최대한 마지막까지 숨겨서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것이 묘미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글쓰기에 익숙한 터라 그 버릇이 영어로 쓴 논문에서도 드러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유학 시절 내내 글쓰기 기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 과학자의 글쓰기법에 적응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다 교수가 돼 다시 국내에 들어왔을 때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현 궁리출판 이갑수 대표(당시 민음사 부장)로부터 대중과학서 집필을 의뢰받았을 때는, 반대의 이유로 애먹었더랬지요. 십수 년간 과학자로서의 글쓰기에 익숙해진 터라 이를 다시 대중의 언어로 풀어내는 게 쉽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문학적 글쓰기와 과학적 글쓰기는 각자 특성이 분명하기에, 상호 전환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글은 양쪽의 특성이 모두 묻어난다고 해요. 즉,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중요시하는 문학적 글쓰기와 결론-이유-근거로 구성되는 테크니컬 라이팅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합니다.

-원래부터 시인을 꿈꿨다고 하지만, 지금껏 집필한 책의 절대다수는 과학논픽션입니다. 현장에서 연구하고 후학을 길러내기만도 바쁠 텐데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습니까?

솔직히 처음 국내에 들어왔을 때 내가 하는 대중과학서 저술 활동에 대해 주변 동료 선후배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놓고 나를 나무라는 이들도 있었고요. 글쓰기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학과의 교수들이 보내주는 응원의 메시지가 날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내가 속한 자연대학은 공과대학보다 그다지 인기 있는 학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대중과 소통함으로써 자연대학에 관심이 높아지고 우수한 학생의 지원도 늘었다며 감사의 말을 건네왔죠.

그때 유학 시절 지도교수인 에드워드 윌슨 교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윌슨 교수는 사회생물학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정립한 대학자이면서 동시에 매년 대중과학서를 꾸준히 발간하는 활발한 과학논픽션 작가였습니다. 그분이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특별히 잘한 것도 아니었어요. 제가 얼마 전 그분의 추모 동영상에서도 언급했지만, 윌슨 교수는 불안정한 십 대 시절을 보냈고 정규 글쓰기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글을 잘 써서 책을 낸 것이 아니라, 책을 쓰기 위해 일부러 글쓰기 가정교사를 고용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럼에도 대중과학서를 쓰고 과학계 외부와 소통하는 데 힘썼던 이유는, 과학은 사회에 알려져야 하고 과학자는 과학을 사회에 알려야 한다고 여긴 윌슨 교수의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늘 말씀하셨지요. 과학자는 언제든 원하면 과학을 배울 수 있지만, 비과학자는 나서서 알려주지 않으면 과학을 접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어느새 난 그분의 삶을 따라가고 있었고 그분을 닮아간다는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작가의 애장품.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 선생님께 선물받은 인연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김진수 선임기자

작가의 애장품.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 선생님께 선물받은 인연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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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사전을 뒤적거리며

-글쓰기 공간이나 책상에서 글쓰기를 위해 중요한 물건이 있나요?

제가 글 쓰는 공간에 항상 갖춰놓는 것이 사전입니다. 종류도 다양해서 국어사전과 영한사전을 비롯해 속담사전까지 온갖 사전을 갖춰놓아요. 사전을 애용하는 이유는 단어 선택에 예민해서 사전을 뒤적이며 비슷한 단어를 찾아보는 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은 출판사 대표가 들려준 말이 마음속 깊이 남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국민의 어휘력을 늘려주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러니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어의 다양성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전을 애용합니다. 인터넷 사전보다는 물성이 있는 책을 뒤적이는 게 더 좋아 종류별로 사전을 갖춰둡니다.

-지금껏 정말 많은 글을 썼는데, 혹시 교수님만의 글쓰기 비법이나 습관이 있는지요?

제가 글을 쓰는 데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어떤 원고든 마감에 앞서 미리 쓴다는 것입니다. 원고를 미리 쓰는 이유는, 계속해서 원고를 고치고 다듬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고 청탁을 받을 때 항상 기한을 넉넉하게 달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기한에 상관없이 마감이 다가오면 글이 나온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글이 술술 나오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무조건 미리 씁니다. 고치면 고칠수록 글이 좋아진다는 걸 알기에 전 여건만 허락된다면 글을 100번이라도 고칩니다. 무조건 미리 쓰고 여러 번 고치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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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글의 소재는 어디서 구하는지요?

그 점에서는 내가 생물학자인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청나게 다양한 대자연이 모두 소재가 되거든요. 그래서인지 대중과학서를 근 25년째 쓰고 있어도 글감이 고갈될 걱정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무궁무진한 소재를 어떻게 글로 잘 엮어내느냐가 고민일 따름이지요.

글쓰기에 도움이 된 책이 있다면요.

윌슨 교수가 쓴 <인간 본성에 대하여>입니다. 윌슨 교수는 뛰어난 학자였으나 글쓰기 재능은 있지 않아 가정교사를 두고 배울 정도로 노력한 결과, 평론가들은 윌슨 교수가 어떤 주제를 쓰든 적어도 독자가 알아듣게 쓴다고 평가했습니다. 윌슨 교수에게 전문 분야를 대중의 언어로 바꿔 알아들을 수 있게 쓰는 능력은, 그의 재능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아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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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마감하고 100번이라도 고친다

-과학논픽션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미국 유학 때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외국인 대학원생을 위한 논문 쓰기를 도와주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당시 담당교수가 바로 앞서 내게 과학 논문을 시처럼 쓴다고 평가한 분입니다. 그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가진 생각을 언어로 명확하게 풀어내는 법을 배울 수 있었지요. 그분과의 인연은 꽤 깊어서, 수업이 끝난 뒤에도 종종 따로 만나서 그분이 글을 평가해줬지요. 이후 내가 하버드대학으로 옮기면서 이분께 추천사를 부탁했는데, 그때 나를 ‘분명하고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 표현한 구절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후 나에게 작가로서 정체성의 기초가 되는 글귀가 됐습니다. 과학논픽션 작가는 사실을 다룹니다. 그렇기에 사실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실을 군더더기 없이 전달하되 천박하지 않은 격조를 갖춰야 비로소 글이 살아납니다. 내가 글을 미리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실을 정확히 담으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글을 쓰고 싶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미 쓴 글을 곱씹고 다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혹 교수님의 마음속 작가가 있을까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요?

흠, 아무래도 헤르만 헤세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헤세는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소설이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시를 더 좋아합니다. 헤세의 시는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지만 매우 서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매우 인텔리전트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담았지만 따뜻함도 함께 갖췄어요. 그 느낌은 간결하면서도 우아해야 한다는 나름의 글쓰기 철학과도 맞물려 더욱 애정이 갑니다.

에필로그

인터뷰에 더해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느덧 창밖의 햇살이 기울기 시작했다. 엄마를 기다릴 아이들을 맞이하러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문득 최재천 교수님과의 첫 인연이 떠올랐다. 내가 교수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아이 덕분이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생물학과를 졸업하려면 생태학이 필수 과목이었지만 우리 학교에는 생태학 전공 교수가 없었다. 학과에서는 해당 과목을 맡을 이를 구하고 있었고, 우연히도 당시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신촌 언저리에 있어 정기적으로 근처에 오시던 최 교수님이 생태학 강의를 수락하셨다. 아빠 손을 붙잡고 등교하던 어린아이는 이제 서른이 훌쩍 넘은 어른이 되었고, 그 아빠의 수업을 듣던 학생은 자신의 길을 찾아 글을 쓰고 아이들을 보듬으며 살고 있다. 유전자는 이어지고, 밈(비유전적 문화요소)도 이어진다. 부모에게서 아이로, 스승에게서 제자로, 작가에게서 독자로 이어지고, 다시 아이는 부모에게, 제자는 스승에게, 독자는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거대한 유전자와 밈의 유대를 형성한다.

최재천 교수님의 글이 20년이 넘도록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연에서 소재를 빌려와 시를 읊조리듯 들려주는 당신의 글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하니 말이다.

이은희 과학논픽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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