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인간을 사랑할 우주적 이유 [21WRITERS]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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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 교수의 이런 믿음은 책쓰기(읽기)가 단순히 저자(독자)로서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로 읽힌다.
“사람들이 정치·경제적 이슈에 자기 의견을 말하면서 왜 과학기술 분야는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을 계속할지 멈출지, 팬데믹 상황에서 정부의 마스크 착용 방침이 옳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배경지식을 알아야 해요.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국가와 사회와 권력을 이해하고 의견을 내는 것처럼, 교양으로서 과학은 알아야 하는 지식이에요. 현대사회에서 정치 어젠다만큼이나 과학기술의 어젠다가 중요해졌잖아요. 과학이 실제로 우리 삶을 바꾸는 게 많고요.”
김상욱 교수는 최근까지도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글을 썼다. 공저까지 합하면 저서가 열 권이 넘는다. 방송 출연 등 대중 강연도 많다. 그런데도 ‘작가’라는 호칭을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해한다. 굳이 표현한다면 ‘지식 전달자’라고 했다. 그에게 글쓰기는 과학 전문가가 대중에게 과학에 대한 교양 지식을 선물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책은 독자에게는 재미있는데 책을 쓰는 저자로서도 그런가요?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이죠?
“글쓰기… 힘들죠. 너무 힘들어서 즐겁다는 느낌은 별로 없어요. 뭔가를 써서 알려야겠는데 독자한테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무감을 갖고 글을 써요. 글을 단숨에 쓰는 달필이 아니어서 많이 고민하죠. 독자가 많이 좋아해주시니까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게 풀어쓰는 비결이나 노하우가 있나요?
“여러 번 써요. 수없이 고쳐 쓰지요. 어떤 분은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다다닥 순식간에 쓰기도 한다는데 저는 그렇게 못해요. 논문 쓰는 것처럼 정교하게 계속 읽고 고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요. 어쩌면 제가 물리학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과학자는 빈틈없이 완벽하게 설명하려는 태도에 익숙한데, 일반인에게는 정확한 설명보다 적절한 비유가 더 좋아요.”
정육면체 퍼즐인 ‘루빅스 큐브’ 예화(<김상욱의 과학공부>, 194쪽)는 좋은 사례다. 시간은 왜 과거에서 미래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다. 여섯 면을 각각 하나의 색으로 맞춘 큐브를 아무렇게나 돌리면 색이 흐트러진다. 그런데 그 큐브를 다시 아무렇게나 되돌린다고 색이 맞춰질 확률은 극히 낮다. “우주는 확률이 높은 사건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물리학에서는 이를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 법칙)으로 설명한다. 인간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방향성은 엔트로피가 작은 상태에서 커지는 쪽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일방향성을 큐브 돌리기로 설명하는 건 제가 창안했어요. 대개 동전이나 주사위를 예로 드는데, 강연할 때마다 사람들이 흡족해하지 않고 저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엔트로피는 어떤 예를 들면 좋을지 진짜 고민을 많이 했는데, 문득 루빅스 큐브가 떠올랐죠.”
혹평의 충격이 준 깨달음김상욱 교수의 대중적 글쓰기는 부산대 재직 시절이던 2005년 지역 일간지에 ‘영화 속 과학’이란 칼럼을 연재한 것에서 시작했다. 1년가량 쓴 칼럼은 뒤에 <영화는 좋은데 과학은 싫다고?>라는 첫 저서로 출간됐는데, 지금은 절판됐다.
“그때는 글을 쓰면서 행복했어요. 글쓰기는 힘들었지만 대중매체에 글을 연재하는 게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더라고요. 그게 인연이 돼서 영화 주간지에도 3년 가까이 칼럼을 썼어요. 지금 보면 부끄럽죠, 이런 글을 썼다니….(웃음) 그런 기간을 거치면서 글을 쓰고 다듬는 걸 배웠어요.”
당시 김상욱 교수는 몇몇 지인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모멸스러운 말을 들었다. 좌중의 한 기자가 이제 막 나온 그의 칼럼을 읽고 “쓰레기 같은 글”이라고 혹평했다는 거다.
“술 좀 마셨죠, 하하. 격의 없이 한 말인데 충격이긴 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글이 안 좋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그냥 과학지식 좀 끼워넣고 영화 대충 설명하고 버무리는 식이었는데, 저 혼자만 도취하고 아무도 (글에 대한) 피드백을 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그 말을 듣고 깨달은 거죠. 그 뒤로 연구하듯 꼼꼼하게 제 글을 분석해보니 문제가 많더라고요. 글이란 저 혼자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의 대화임을 알게 됐죠.”
그때부터 본격화한 김상욱 교수의 ‘과학의 대중화, 대중의 과학화’는 인문·사회 분야의 방대한 독서와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사유가 만나면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려운 과학 개념을 설명할 때 적절한 인용과 비유는 양념이나 고명이 아니라 필수 재료가 됐다. 그는 평소 다독가로 잘 알려졌다. “어딜 가도 책이 없으면 불안한데, 문자 중독 같기도 해요. 불시에 저를 찾아오면 책 읽는 모습을 보게 될 확률이 제일 높거든요.”
김상욱 교수가 쓰는 글은 허구와 상상에 바탕을 둔 문학이나 개인적 감상을 기록한 수필이 아니라 과학지식을 설명한다. 논픽션 작가에게 요구되는 태도나 자질은 무엇일까? 그가 꼽은 것은 역시 ‘독서’였다.
“당연히 많은 책을 읽어야죠. 직접 경험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모든 걸 경험할 수 없다면, 책이 최고의 경험과 지식의 보고이죠. 스티븐 호킹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론으로 책을 쓸 수 있었지만 모든 물리학자가 그런 건 아니에요. 결국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을 우리말과 나의 언어로 설명하는 건데, 거기에 맞는 장점이 있어야 하잖아요. 저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은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그걸 서로 연결해서 뭔가 새로운 통찰력이 있는 내용을 재구성하는 거죠.”
-교수님한테 ‘내 마음속 작가’ 같은 게 있나요?
“저는 작가를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과 문장이 좋은 사람. 이야기 구성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아르헨티나 작가)와 유발 하라리(이스라엘 역사학자)가 뛰어나죠. 보르헤스는 처음엔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 어느 시점을 딱 넘어가는 순간 빠져들었죠.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다섯 번이나 읽었는데 볼 때마다 ‘정말 이건 잘 쓴 책이다’라는 생각이 들죠. 국내 작가 중에선 백영옥 작가도 좋았어요. 문장이 좋은 작가는 단연 김소연 시인이죠. <마음 사전>(마음산책, 2008)의 문장은 바로바로 인용할 수 있어요. 밀란 쿤데라(체코 출신 작가)도 이야기보다는 문장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김상욱 교수는 <떨림과 울림>을 낸 지 햇수로 4년 만에 곧 저서 목록에 새로 한 권을 더 보탤 예정이다. 출판사에 원고를 이미 넘겼다고 했다. 그의 글쓰기 방식이라면 앞으로도 한동안 고민과 퇴고를 거듭하면서 더 단단하고 빛나게 담금질된 책이 나올 테다. 그의 새 책 출간 예고는 “언젠가 꼭 써보고 싶은 책은 어떤 것인지” 묻는 말에 답하면서 나왔다.
“지금 작업 중인 책은 물리학자의 시각으로 쿼크(원자핵을 구성하는 미립자)부터 인간까지 우주의 모든 것을 다뤘습니다. 일종의 빅 히스토리지요. 5년 전부터 구상했는데 지금 벌써 유행하네요. 이 책 다음에 또 뭔가를 쓴다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처럼,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서 세상을 보는 나만의 관점과 해석을 녹여 넣은 책을 쓰고 싶습니다. 모르겠어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그는 <떨림과 울림>의 프롤로그에서 빛과 소리를 포함한 우주 만물의 미세한 진동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설렘이 다른 이들에게 떨림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울림은 독자의 몫이다.”
김상욱 교수와의 두 시간 남짓한 인터뷰는 즐겁고 유익했다. 과학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인터뷰에 앞서 그의 저작 중 단독 저서 세 권을 포함해 여섯 권을 샀다. 그중 완독한 책은 두 권뿐임을 고백한다. 나머지는 발췌독을 했다. 해박한 지식과 절묘한 비유에 감탄하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진지한 사유에 고개를 끄덕인 대목이 많다. <김상욱의 과학공부>는 고3 아들에게 필독서로 권했다.
그는 천생 물리학자였다. “글을 쓰는 건 힘들지만, 물리학은 그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논리적이고 정확했다. 그의 책들을 펴낸 출판사 동아시아의 한성봉 대표는 “김 교수의 글쓰기는 뛰어난 상상력과 엄정함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인문학적 훈련이 잘되신 분이어서, 메타포(은유)의 감각이 굉장히 뛰어나고 아이디어 포착력도 아주 좋으세요. 글쓰기와 퇴고에도 엄격하시죠. 단어 하나를 고를 때도 많이 고민하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것도 편집자와 수없이 의견을 조율하며 퇴고를 거듭하는 필자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 그의 저서 중 한 권에 저자 사인(사진)을 부탁했다. 다섯 줄 사인은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간명했다.
암호 같은 글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뒤늦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물어봤다. 조금 뒤 답신이 왔다. “ㅎㅎㅎㅎ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양자역학의 핵심 수식입니다. H와 E는 영문 알파벳이고, 이상한 문자는 그리스 문자 Ψ(프시)의 소문자입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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