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최한 1차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토론회. MBC 화면 갈무리
도합 39%.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2022년 2월3일 첫 텔레비전(TV)토론에 나선 네 명의 대선 후보가 지상파 방송 3사를 통해 끌어올린 시청률이다. 2021년 도쿄여름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이 4강전에서 끌어올린 38%, 그리고 2022년 베이징겨울올림픽 쇼트트랙 대표팀이 끌어올린 시청률 35%보다 높다. 이 수치에 담긴 건 아마도, 동시대 유권자의 민주주의 열망만은 아닌 듯했다.
대선 토론은 지상 최대의 TV토크쇼다. 생방송, 말의 결투, 편집되지 않은 진짜 말투와 목소리, 도발적인 표정, 버벅대기, 유행어와 밈(인터넷에서 거듭 모방되는 콘텐츠) 탄생까지. TV토론은 그 자체로 재미있고, 관심의 절정에서 시청자의 참여와 쾌락을 창출하는 대중문화와 엔터테인먼트의 총체다. 높은 시청률의 정체는 열혈 유권자와 열혈 시청자, 그리고 밈의 탄생을 기다리는 몇몇이 섞인 뜨거운 무언가다.
안철수·심상정 등 대선 후보들의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과 ‘양자 TV토론’을 불허한 법원의 결정에 이르는 우여곡절 끝에 열린 첫 TV토론에서 나는 의외의 발견에 도달했다. 대선 후보자들의 특성에 최적화된 방송 기획과 토크 형식이 떠올랐다. 2월21일 TV토론에서 채택한 ‘시간총량제토론’ 형식이 후보자들의 강점과 토론의 본질을 하나도 살리지 못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니 후보자의 전략, 유권자의 권리, 그리고 시청자의 쾌락을 동시 충족하는 ‘대화’의 형식을 찾는 일은 더욱 중요하게 생각됐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이 국민 프로그램급 명성을 얻은 데 이어, 토론 예능의 명가 JTBC가 <가면토론회>로 일으킨 대대적 논란까지. TV 방송에서 토크쇼 포맷이 전성기인 요즘, 나는 동시대 가장 중요한 토크 프로그램 몇 편에서 지혜를 빌려오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완전히 새로운 토론의 장을 구축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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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기’ 포맷의 방송이 전성기다.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각 방송사 제공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는 근현대의 거대한 역사적 일대기를, 어느 무명인의 작은 이야기로 다시 써서 전하는 토크쇼다. <꼬꼬무> 스토리텔링의 99%는 작가진의 필력과 고강도 노동을 통해 ‘미리’ 완성된다는 점에서 일방적이고 폐쇄적이다. 내용을 먼저 숙지한 화자(장도연·장성규·장현성)와 그러지 못한 청자(이야기 친구)는 엄격한 위계를 형성하는데, 이 불평등한 소통 구조에 놓인 ‘이야기 친구’들은 자기가 쥔 유일한 무기가 경청과 공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손님으로 온 이야기 친구들이 그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할 때, <꼬꼬무>는 비로소 팟캐스트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쌍방향 대화를 창출하는 토크쇼 지위를 회복한다. 이야기 친구들은 MC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고, 깜짝 놀라고, 이해되지 않는 순간을 멈춰 세운다. <꼬꼬무>가 TV토크쇼로 성립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은 경청과 공감이다.
TV토론에서 경청과 공감을 보여준 사람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였다. 일련의 네거티브 과정에서 후보 본인의 과거와 평소 성정이 다소 과격하게 묘사된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결과다. 이 후보는 사회자에게 발언권을 얻을 때마다 “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고, 일부 후보의 공약을 들으면서는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이며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라고 적극 호응했다. 몸은 항상 상대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에 대한 보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때는, “지금 이 순간에 누군가는 세상을 하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선택해서”라고 발언을 시작했다. 이는 거대한 문제를 한 개인의 미시사로 치환해 호소하는 <꼬꼬무>의 전략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꼬꼬무>가 자체 스토리텔링 기법을 개발해 젊은 시청자들이 역사 문제에 접근하는 쉽고 재미난 길을 열었듯, 이재명 후보 역시 경제 문제를 둘러싼 개별 인간사를 호소하며 시청자의 동감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전문가가 대화의 마디를 만드는 tvN <알쓸범잡>. 각 방송사 제공
tvN <알아두면 쓸데있는 범죄 잡학사전>(알쓸범잡)의 스토리텔링이 재밌는 이유는, 토크쇼에 참가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어색하게 대본을 읽는 게 아니라, 화자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 검증이 완료된, 즉 사실에 근접한 정보와 지식을 대화의 마디마디에 꺼내놓는 즉각성과 유연성에 있다. 생활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채널A <알토란> 같은 방송이 전개되는 방식과 달리, <알쓸범잡>은 출연진의 자유로운 말하기를 과감하게 보장하며 전문가의 예능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알쓸범잡>의 콘셉트에 대해 “여러 분야의 잡학 지식이 만나고 합쳐지며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은 결국 프로파일링의 그것과도 같다”고 말했다.
대선 토론을 <알토란>이 아닌 <알쓸범잡>으로 만드는 사람은 심상정 정의당 후보다. 심 후보는 주제를 둘러싼 수치상 근거, 전문가의 주장(토마 피케티), 그리고 역사적 사례(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살찐고양이법)를 사전에 확보해 자유자재로 대화 곳곳에 활용하는 유일한 토론자였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구체적 근거를 숙지하지 않은 채 땅만 보고 자료를 읽는 모습이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윤 후보를 향해 대화 주제에 관한 정보값을 ‘장학퀴즈’처럼 물어보며 답변을 요구하는 태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심 후보의 이러한 전문성과 준비성은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프로파일링의 과정’으로서 TV토론을 다시 세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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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이 곧 대화 참여자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부여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전문성 장착은 곧 금기에의 도전으로 이어진다. “TV 시대의 정치란 준비된 원고, 천편일률적인 답변, 외워서 전달하는 요점으로 가득한, 대본대로 따라 하는 이벤트가 될 수밖에 없다”(<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루 포터)는 비관적 전망을 전복한다. 고착화된 TV토론의 클리셰와 후보자들의 몸 사리기, 어떻게든 ‘방송사고’를 피하려는 방송사 특유의 안정지향성을 파괴하고 아고라(공공의 광장)를 통째로 뒤흔드는 건 언제나 심상정의 몫이다. 성별 갈라치기를 하는 거대 양당의 전략을 비판하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범죄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국민의힘 후보자에게 사과를 촉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1분을 통해 지하철 이동권 투쟁을 하는 장애인들을 대변하는 후보자. 금기에 도전하는 말하기는 시퍼런 객기나 투철한 정의감 같은 것에서 오지 않는다. 문제의 핵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객관적 지표, 논리적 분석 그리고 당당한 전문성을 갖춘 자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서 온다.

오디션에서도 말은 중요하다. Mnet에서는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이어 <스트릿 맨 파이터>가 시작된다. 각 방송사 제공
오디션 프로그램의 ‘말’적인 성격이 주목받지 못하는 건 부당하다. 오디션 포맷에서 ‘말’은 춤과 노래만큼이나 내러티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토크쇼와는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말’의 활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오디션에 참가한 비연예인은, 스타 중심의 여타 프로그램보다 수준 높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속성에 그 핵심이 있다. 스타가 되기를 바라지만 아직은 스타도 공인도 아닌 이들의 말투나 태도는 사전에 기획되거나 인위적으로 교정된 것이 아니다. 덕분에 미션 수행, 팀별 협업, 개별 인터뷰 과정에서 드러나는 ‘오디션 프로의 말하기’는 표현 수위, 소재의 확장성 그리고 화자의 진정성이란 측면에서 여타 토크쇼의 수준을 추월한다. 시청자는 바로 이 ‘경계에 선’ 말하기에 열광하며, 오디션 참가자들의 개별성과 존재성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Mnet이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다시 한번 성공시키며 오늘날에도 오디션 명가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날것의 대화’를 낚아채고, 잡아 올려, 맛있게 손질하는 독보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다가오는 여름,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후속작인 Mnet <스트릿 맨 파이터>에 출연할 가능성은, 물론 크지 않다. 그럼에도 윤석열의 말하기가 오디션 프로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건, 그가 선거캠프에 의해 기획되거나 교정되지 않은, 가장 눈치를 덜 보는 방식으로 말하는 후보이기 때문이다. 사석과 공석에서의 말하기 습관을 아주 비슷하게 유지하는 것, 쉬운 언어를 쓰고, 때론 반말을 하고, 자기 입말 그대로를 TV 스튜디오에 끌고 오는 선택에는 일장일단이 따른다. 만약 토론을 주관하는 방송사가 Mnet이었다면, 후보자들의 말하기가 유명인과 무명인의 ‘경계’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더 ‘날것’에 다가갈수록 이른바 ‘악마의 편집’에 희생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유권자이자 시청자로 동시 기능하는 우리가 TV를 통해 그토록 확인하고 싶은 건 (뻔하지만) ‘정치인의 진짜 모습’ ‘꾸밈없이’ ‘진실된 모습’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그것을 원한다면 TV토론의 경직된 형식, 벼락치기로 훈련된 기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모든 겉치레를 지나서, 인간 본연의 입말을 허용한 뒤 귀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매번 “로봇 같다” “무조건 말실수할 것이다” 같은 놀림을 받아온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말하기를 다시 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 번째 대선 출마에도 그는 여전히 버벅댔고, 혀가 꼬였고, ‘로봇 같’았다. 그럼에도 갖은 핑계를 대며 토론을 거부해온 윤석열 후보와 그가 다른 점은, 입말로 드러날 자신의 정치적 진정성을 스스로 믿고 있으며 그것이 TV 너머 사람들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안 후보는 2월21일 토론에서 이른바 ‘절레절레 짤’을 탄생시켰다. 윤 후보가 준비해온 수준 이하의 답변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술 전문가의 솔직한 심정으로 ‘도리도리’ 대응하는 모습은 오디션으로 치자면 조회수 1위의 ‘입덕 영상’인 셈이었다.

여러 명이 등장해 말의 희열이 넘치는 JTBC <다수의 수다>. JTBC 제공
대선 토론에서 모두가 빛나는 순간은 다자간 소통이 가능해질 때, 즉 <다수의 수다>(JTBC)가 되는 순간에 발생한다. 이재명 후보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TV 내부의 대화를 TV 너머 시청자에게 가닿도록 만드는 순간에. 심상정 후보가 자신이 누구를 ‘대신해’ 말하는지, 그리고 나의 목소리가 ‘누구에게’ 들릴지를 명확하게 계산해 입체적 소통으로 구현하는 순간에. 안철수 후보가 세 사람 모두에게 열린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후보자들에게 답변 기회를 배분하고 연금개혁 의제에 관한 공동선언을 제안하는 낯선 순간에. 다자간 소통은 가능해지고, 대화는 수다로서 무한히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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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수다>는 다자간 소통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최고의 토크쇼다. 수다는 둘이 아니라 넷을, 넷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초대하고, 바로 이 수다스러운 환경에서 말의 엔트로피(무질서도)는 가장 높아진다. 화자와 청자 관계가 급격하게 뒤바뀌고, 순서가 없는 예측 불허의 상황이 발생하며, 난데없는 말들의 침입이 벌어진다. 우리의 토론은 가장 수다스러울 때, 말의 본질과 소통의 본질을 되찾을 것이다.
대선까지 이제 2주가 남았다. 그간 TV에 초대받지 못했던 작은 정당의 대선 후보들도, 이 새로운 토론 플랫폼에 입장해 실컷 수다를 떨어보기 바란다.
남지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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