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 번역 작업 중인 책상 위 모습.
전문적으로 번역을 배워본 적 없는 내가 번역을 말할 때 기대는 책이 있다. 책상 위에 늘 펼쳐져 있는 책, 다와다 요코의 <여행하는 말들>이다. 나는 번역하는 동안만큼은 그 책을 덮지 못한다. 불문학을 번역하는 내가 독문학을 번역하는 일본 번역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조금 이상하지만, 내게는 스승이 필요하고, 그 책은 늘 내 물음보다 조금 더 큰 사유를 건네주는 좋은 스승이다.
책을 펼치면 오래 한 자세로 있다가 몸이 굳은 사람처럼 늘 같은 페이지가 열린다. 212쪽. 거기, 선명하게 밑줄 그은, “언어에도 몸이 있다”라는 문장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글에는 의미만이 아닌 몸이 있어서, 그 몸에는 체온, 자세, 아픔, 습관, 개성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일단 그 문장을 읽으면 망막한 번역이 어떤 ‘몸’을 바라보고, 만지고, 결국 그 몸이 되어 보는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포토 칼럼니스트이자 오토픽션(자전소설)을 쓴 작가,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을 옮겼다. 성적소수자인 에르베 기베르가 에이즈에 걸린 자신을 매개로 죽음 언저리의 삶을 기록한 글인데, 작가가 자조적 말투로 ‘의학 에세이’라고 할 만큼 에이즈를 앓고 치료하는 과정이 소상히 담겨 있다. 그 작품을 옮기는 동안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는 에이즈라는 질병 속에서 작가와 함께 병을 체험하는 일이 었다.
육체적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겪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이해하고, 성적소수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 내게는 그 모든 것이 그의 ‘몸’이 되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고통을 이해할수록 내게 찾아오는 물음들이 있었다. 내가 그였다면 절망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을까. 소수자의 삶을 산 그의 절망은 정말 온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했던 것일까. 에이즈가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였다면 이미 수십 년 전에 백신과 치료법이 나왔을까. 동성애자를 향한 차별적 시선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병으로부터 조금 더 많은 사람을 구했을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기술과 의학의 발달로 정말 덜 야만적인 것이 되었을까. 어쩌면 이 물음들은 에르베 기베르의 언어가 나를 빌려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먼 시간을, 먼 길을 건너온 언어는 그러니까 이렇게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2022년, 그곳은 조금 나아졌습니까?
누군가 내 일을 물으면 번역이라는 말보다 글을 ‘옮긴다’라는 동사를 써서 말한다. 동사로 말하는 나는 몸으로 말을 살아내는 사람이 된다. 더 오래 엉덩이로 버티고, 납작한 활자가 아닌 피와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만지는 마음으로 단어를 고른다. 이는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창작일 것이다. ‘옮긴다’는 말속에는 머물던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향하는 이동의 의미가 있고 그 걸음에는 새로운 시선과 발견, 길의 확장이 있으니 그것이 창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오늘도 나는 언어라는 몸을 마주하고, 그것을 등에 업고 옮긴다. 작가의 커다란 언어의 무게로 바뀌는 내 자세는 결국 내 몸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들의 언어가 머물다 간 나의 몸은. 사랑하는 이를 맞이하는 모든 자세가 그렇듯, 더 굽어지고 더 꺾이길 희망한다.
글·사진 신유진 번역가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탄핵 선고 앞두고 주말 ‘100만 시민 총집중의 날’
김건희 개인송사 지원한 대통령실…대법 “근거규정 공개해야”
금요일 밤에도 “윤석열 파면”…마지막일지 모를 100만 집회 예고
“윤석열만을 위한 즉시항고 포기” 검찰 앞 1인 시위한 판사 출신 교수
“윤 대통령, 김건희 특검법으로 힘들어해…한동훈엔 심기 불편”
‘소득대체율 43%’ 연금안, 이르면 다음주 복지위 처리할 듯
“윤석열 즉각 파면”…노동자·영화인·노인·청년 시국선언 잇따라
김새론 모친 “딸 거짓말 안 해…사이버 레카 단죄할 길 만들고 싶어”
임은정 검사 “즉시항고” 게시글, 검찰 내부망서 2시간 만에 삭제
윤석열 탄핵선고 지연에 야당 긴장감…“심상찮다” “8대0 불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