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추 지지대에 들러붙은 사마귀 알집.
이미 서리가 여러 번 다녀간 12월 초 주말, 밭에서 뒤늦게 고추 지지대를 뽑았다. 고추 줄기는 워낙 잘 쓰러지는 탓에 봄에 모종을 심은 뒤 한 줄기마다 지지대를 하나씩 세워줘야 한다. 시골 동네 철물점에 가면 길이에 따라 지지대 1개당 500~1천원에 판다. 이래저래 사 모은 지지대가 얼추 100여 개다. 든든하다. 이만하면 나도 이 밭에선 자산가다.
고춧잎이 시든 지도 오래, 진작에 다 뽑아 평상 아래 가지런히 정리해놓아야 했으나 얼치기 농군이 게으르기까지 해서 좀 늦었다. 월급 받고 일하는 회사에선 내 일을 끝마쳐야 다음 공정을 맡은 동료가 작업할 수 있다. 내가 약속한 시각에 제때 기사 출고를 하지 못하면 “신문 안 만들 거냐”는 편집부 동료의, 때론 격렬한 타박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쩌랴. 여긴 회사가 아니라 밭인데…. 작업 통제 권한을 나 혼자 행사하고 그 책임도 전적으로 내가 진다. 밭에선 나도 자영업자란 말이다.
지지대를 뽑고 있는 밭 풍경은 쓸쓸하다. 을씨년스럽다. 겨울이란 한 방향을 향해 이미 서너 발걸음이나 무겁게 내디딘 탓이다. 들깨는 이미 털었고, 더덕 씨앗도 다 받아놓았다. 몇 달 전 뽑혀 여기저기 널브러진 옥수수 줄기며 풀이며 죄다 말라 비틀어졌다. 생명력이라곤 찾기 어렵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 뒤 망해버린 국토와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을 다룬 명곡 <봄날은 간다>(1954년)의 노랫말처럼 말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이 가고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이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2021년 나의 알뜰한 맹세와 실없는 기약은 무엇이었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광고
나지막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뽑던 지지대에서 작은 스펀지 덩어리처럼 생긴 게 붙어 있음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사마귀 알이다. 이런 고춧대는 한두 개가 아니다. 사마귀는 봄에 알에서 나와 초겨울에 죽는데, 이에 앞서 교배를 마친 암컷이 대개 식물의 굵은 가지 같은 곳에 알을 낳는다. 내 밭의 사마귀는 고추 지지대를 산란 장소로 택한 것이다. 지난해 곤충 사육을 좋아하는 큰아들을 위해 밭에서 잡아온 사마귀를 집에서 키웠는데, 어느 날 그 녀석이 배 뒤쪽 산란관에서 하얀 치약 거품 같은 액체를 내뿜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 있다. 시간이 지나면 갈색으로 겉이 변하는데, 겨우내 추위로부터 그 안에 있는 알을 보호하는 막이란다.
내년 봄에 곤충 가운데 상위 포식자인 사마귀의 새끼들이 바글거리며 막을 뚫고 밭으로 기어나올 테다. 그러고는 봄날 작물의 연한 잎을 뜯어먹어 내 미움을 사는 메뚜기며 방아깨비를 잡아먹고 살겠지. 사마귀는 대체로 육식성이라 작물을 먹지 않는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고추 지지대에 붙은 사마귀 알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쟁여놓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겨울 밭에서도 사마귀는 제 생명을 마칠 무렵 내년 봄의 찬란한 탄생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어쩌면 겨울은 생명 순환의 끝자락이 아니라 시작점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사회에디터 symbio@hani.co.kr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한국에 상호관세 26%…트럼프, 무역질서를 파괴하다
탄핵심판 안 나온다는 윤석열…파면돼도 관저서 며칠 더 버티기?
오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림판]
윤석열 선고 전야, 마지막 광장의 염원…“전원일치 파면하라”
‘원피스’ 감독 “지브리를 더럽히다니, 챗GPT 용서하지 않겠다”
도이치 주가조작 유죄 확정…김건희 재수사는
안창호 인권위원장 ‘4·3 추념식’ 불참…“부적절” 지적 잇따라
오늘 서울 전역 비상 경계…경찰 “불법 무관용” 재차 강조
펭귄도 ‘깜짝’ 놀란 트럼프 관세…사람 없는 남극 섬에도 부과
“나경원·전한길 유세 마이너스”…‘재보선 참패’ 국힘 내부서 쓴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