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24일 수확한 텃밭 김장배추는 대형마트에서 파는 ‘알배기 배추’를 연상시켰다.
시점은 기가 막혔다. 그래도 팍팍한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지독히도 미미했던 올해 김장농사 얘기다.
2023년 첫눈이 온 뒤 수확한 배추는 실한 편이었다. 모종을 9월 초에 낸 터라, 비닐까지 덮어주면서 1주일이라도 더 키운 게 주효했다. 얼어붙은 겉잎을 쳐낸 뒤에도 단단히 찬 속이 듬직했다. 2024년에는 예년보다 일찍 모종을 낸 것도 추위를 피해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였다.
지난 8월 중순 양주화훼단지에서 배추 모종 200주를 사는 호기를 부렸다. “벌레가 아무리 실컷 먹어도 충분히 남을 것”이라고 히히댔다. 오후에도 제법 해가 잘 드는 쪽으로 골라 밭 11고랑에 배추를 냈다. 듬직했다. 1주일 뒤엔 ‘영양제’(복합비료)까지 듬뿍 줬다. 이제 찬 바람만 불면 아무 문제가 없겠다 싶었는데, 기다리던 찬 바람은 모종을 내고도 한 달여를 불지 않았다.
더워도 너무 더웠고, 배추는 메말라갔다. 설상가상 좁은가슴잎벌레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방충망처럼 초토화되다시피 한 배추를 그나마 살린 것은 친환경 기피제였다. 기다리던 찬 바람이 불고, 이내 날이 차가워졌다. 배추도 제법 의젓해졌다. ‘최대한 키워보자. 속은 차겠지. 그래도 지난해보단 낫지 않겠어.’ 희망을 품었다. 약간의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매주 조금씩 몸집을 키우는 배추를 보며 텃밭 동무들 모두 기대감에 들떴다.
기상청 중기예보를 보니, 11월 마지막주 중반부터 영하권 날씨가 이어진단다. 밭장이 동원령을 내렸다. 11월24일 낮 빨리 올 수 있는 동무 4명이 먼저 모였다. 전날 지역에 갔던 동무는 부랴부랴 상경 중이었고, 막내는 예배당이 끝나는 대로 달려오기로 했다.
무부터 뽑았다. 땅 위로 올라온 부분이 제법 ‘시장 무’처럼 보였던 무는 줄기를 잡아당기니 ‘쏙’ 하고 올라왔다. 땅속에 있던 부위가 모조리 오종종하다. 그나마 제일 잘 자란 녀석이 ‘시장 무’ 절반이나 될까? 나머지는 크다 말거나, 아예 총각무 수준이다. 씨를 두 봉지나 뿌렸는데, 종잣값은 되려나? 속 좋은 밭장은 “동치미 담그면 맛나것다”며 웃는다.
배추는 2인2조로 나눠 수확했다. 한 사람이 벌레가 다 먹어치운 겉잎을 손으로 펼쳐 밀어내면, 칼을 든 사람이 배추를 뉘어 뿌리를 잘라 거두는 식이다. 200포기 다 수확하는 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간혹 속이 꽉 찬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수확한 배추 대부분은 대형마트에서 파는 ‘알배기 배추’와 닮아 있다. 벌레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뒤늦게 도착한 두 동무는 “벌써 다 끝냈느냐”고 한 번 놀라고, 초라한 수확물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밭장은 채 크지 않아 수확을 포기한 돌산갓밭에서 계속 잰 손을 놀린다. “어따, 동치미에 넣어 담그면 맛나것다” 하면서.
모종을 200개나 내며 화려하게 출발했던 올 김장농사는 희비극으로 끝났다. 더위를 내다보지 못하고 일찍 모종을 낸 것부터가 패착이었다. 헛헛한 마음에 수확한 배추와 무를 물에 아무렇게나 씻어 베어 물었다. 와, 달다. “배추를 이렇게 맛있게 키웠으니, 벌레가 그렇게 꼬였지.” 동무의 말에 너나없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배추, 무를 갈무리해 나눈 뒤 한 해 뜨거운 햇살을 가려줬던 그늘막을 내려 평상을 덮는 것으로 올 농사를 마무리했다. 사흘 뒤 첫눈이 내렸고, 영하의 추위가 이어졌다. 수확 시기만큼은 ‘신의 한수’였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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