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텃밭 동무의 비닐 터널 안에서 추위를 이겨낸 마늘이 새순을 올렸다.
상추는 예상대로 얼어 있었다. 찬 바람 쌩한데 햇살 가려 그늘까지 진 텃밭은 황량하고 쓸쓸했다. 맨흙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늦가을까지 온기와 웃음이 가득했던 평상은 덮어놓은 그늘막이 바람에 찢겨 너덜너덜했다.
추위를 핑계로 예정했던 시농제를 늦췄다. 나른한 휴일 오후 갑자기 밭이 그리워졌다. 차를 몰아 20분 남짓 만에 도착한 텃밭 들머리엔 말라붙은 밤송이가 잔디처럼 깔려 있다. 강풍에 꺾인 소나무 가지가 밭고랑 한편을 차지하고 누워 있다. 부러진 다른 가지 하나는 나무 끝에 매달려 위태로워 보인다. 치우는 데 애는 좀 먹겠지만, 농사철 시작되면 한동안 땔감 걱정은 안 해도 될 듯싶다.
지난가을 한 고랑 비닐을 씌우고 터널을 만들어준 상추밭 쪽으로 향했다. 밭으로 달려오는 내내 ‘혹시나 살아 기쁨을 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냉랭한 날씨에도 안으로 물기를 머금은 비닐을 툴툴 털었다. 상추가 보인다. 아! 한껏 오그라든 모습이다. 추위에 얼어서 그렇다. 한 겹 비닐로는 겨울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도 빛깔은 연초록을 유지하고 있다. ‘날이 풀리면 살아날까?’ 부질없는 기대와 미련이 다시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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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비닐을 벗겨보려는데 꿈쩍도 않는다. 비닐 끝을 덮어준 흙이 언 모양이다. 삽자루를 찾아 덮은 흙을 파보자. 평상 밑에 보관해둔 삽을 꺼내 땅에 대고 발에 힘을 줬다. 턱도 없다. 겉흙이 부드러워 방심했는데, 땅속은 꽁꽁 얼어붙었다. 비닐을 걷어낼 결심이 아니라면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3월 중순까지 두고 보기로 했다.
눈 돌려 밭을 둘러봤다. 걷어내지 않은 배추 겉잎으로 허옇게 덮인 김장밭을 빼고, 그 푸르던 밭이 고랑 고랑 흙만 남은 채 앙상하다. 초록의 생명으로 충만했던 주변 나무도 앙상한 뼈대만 남아, 바람에 연신 흔들리며 바사삭거린다.
저만치 홀로 자경을 고수하는 동무 밭에서 비닐이 펄럭인다. 가만히 가보니 양파와 마늘을 심은 작은 비닐 터널이다. 터널 안에선 ‘싸움’이 한창이다. 추위를 이기고 땅을 뚫어낸 마늘 새순이 제법 초록이다. 양파는 땅 위에 내놓은 줄기를 추위에 내주는 대신, 땅속에서 뿌리를 키우는 모양이다. 지난 늦가을 두어 고랑 씨를 뿌린 시금치밭으로 가봤다. 아무 조짐도 없다. 아직 나오지 않은 시금치도 마늘과 양파처럼 지금 저렇게 싸우고 있을까?
마트에 들러 고추, 얼갈이배추, 쌀 등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인터넷 원예 백화점에서 주문한 혼합쌈채, 혼합상추, 혼합양상추 등 모둠씨앗 삼총사가 도착해 있다. 케일, 다채, 적겨자, 청겨자, 적치커리, 청치커리, 적치마, 청치마, 적축면, 흑치마, 담배상추, 적로메인, 청로메인, 결구양상추, 청오크, 적오크. 다가오는 봄엔 모두 16가지 잎채소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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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한편에 보관 중이던 모종판과 배양토를 꺼냈다. 씨앗 한알 한알이 생명을 머금고 있다. 씨앗이 발아해 잎을 내고 뿌리를 내리고 키를 키워 옮겨 심을 수 있을 무렵엔 봄이 한창일 터다. 밭도 다시 푸르러질 테고, 흩어졌던 동무들도 다시 모일 게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모종판에 씨를 넣는다.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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