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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 들으니 물고 있던 츄파춥스가 말보로 레드로

치명 플레이리스트’ 중독기 ①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주는 음악들
등록 2021-11-27 19:56 수정 2021-11-28 12:36
유튜브의 이른바 ‘치명 플레이리스트’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유튜브의 이른바 ‘치명 플레이리스트’들. 유튜브 화면 갈무리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 대부분은 대중가요다. 문화에 대해 쓰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취향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부끄러운 구석이 있다. 그래도 몇 년 전부터 케이팝을 취향으로 밝히는 힙스터들이 나타났다. 디제이(DJ) 요일바가 엔시티(NCT)를 영업하거나, 소설가 박상영이 트와이스에 대한 덕심을 열렬히 표현하는 등. 하지만 음악에 일가견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듣는 케이팝은 아무래도 맥락이 다른 것 같다. 그런데 좀더 고민스러운 건 대중가요 가사의 ‘사랑 타령’이다. 그 정점에는 ‘치명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치명 플레이리스트가 뭔가 하면, 치명적인 분위기의 멜로디와 가사로 선곡된 유튜브 음악 콘텐츠다. 치명이라는 키워드 외에 퇴폐, 타락, 섹시, 누아르, 조직 보스, 빌런, 광공(상대에게 집착하는 캐릭터)으로도 찾아볼 수 있다. 선곡들은 영화 <할리퀸>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아리아나 그란데의 <데인저러스 우먼>(Dangerous Woman), 윌 보스의 <더 데빌 아이 노>(The Devil I Know) 등이다. 그리고 섬네일은 진한 화장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여성의 모습이거나, 찌푸린 표정으로 담배를 문 톰 하디 얼굴에 흑백 톤 혹은 새빨간 필터가 쓰여 있어야 한다.

영상 제목은 이런 식이다. ‘츄리닝 입고도 치명치명해지는 섹시한 팝송 모음’ ‘다 비켜, 승자는 나니까’ ‘지금 하는 이 키스는 널 믿겠다는 침묵의 맹약이야’ ‘오늘 할 일, 섹시하고 파워풀하게 샤워하기’. 댓글창에는 치명적인 주인공에 빙의한 ‘설정 글’들이 달려 있다. 그 ‘소설’들이 그리는 남성 캐릭터는 제멋대로인 성격이지만 잘생기고 조직 보스가 될 만큼 힘이 있고, 그래서 사랑하기에 위험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어 치명적이다. 바꿔 말하면, 그런 남자가 사랑하는 주인공 역시 치명적이다. 이 모든 걸 짚어보면 여기서 말하는 치명이란 독극물 같은 게 아니라 성애적 관계에서 매력이 너무 넘쳐난다는 뜻이다.

이 플레이리스트는 분명히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비슷한 경험을 말하는 댓글들이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취업 준비하고 자소서 썼는데 지금 원하는 회사 취업해서 다니고 있습니다. 노래 덕분에 자신감 얻고 잘할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후. 전 남친 안 잊혀져서 조용한 음악만 듣고 있었는데, 이거 들으면서 작업하니까 나간 사람 미련 안 두고 내 할 일 하는 졸 시크한 커리어우먼 된 느낌. 그래 나는 내 갈 길 가는 거다.” “이 노래 들었더니 입에 물고 있던 츄파춥스가 말보로 레드가 되었습니다.”

나도 치명 플레이리스트를 노동요로 들을 때가 많다. 머리도 못 감은 채 스타벅스 한구석에서 노트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 곡들이 귀에 꽂히는 순간 갑자기 뒷주머니에 총을 숨겨둔 마피아로 ‘기억 조작’이 된다. 어떤 목적을 위해 다른 건 필요 없다는 듯 질주해야만 할 것 같다. 그 기분을 빌리면 드디어 문장 몇 개가 써지곤 한다. 역시 이 생각을 문장으로 쓰고 나니 더욱 ‘항마력’이 달린다(이 주제로 쓰기를 계속 망설인 이유다). 매력적인 아이돌도 종종 “치명적인 척”한다고 욕먹는 와중에 이렇게 치명적인 기분에 젖어 있는 모습이라니. 누구 나한테서 ‘치명 타령’ 좀 압수해줄 사람?

그런데 치명 타령 압수되기 전에 이거 하나는 풀고 싶다. 치명 플레이리스트는 왜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주는지. (계속)

도우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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