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 애호가이지만, 마시는 대부분은 가짜 커피다. 트위터 밈에 따르면 가짜 커피란 살기 위해 포션(Potion·물약을 뜻하는 단어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게임에서 에너지 회복 아이템을 말한다)처럼 마시는 커피이고, 진짜 커피란 날씨 좋은 날 회사나 학교가 아닌 진짜 카페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오로지 커피와 디저트를 먹을 때 존재하는 커피를 말한다.
가짜 커피의 대표 격으로는 링거처럼 수혈하듯 마시는 1ℓ짜리 대용량 아메리카노, 카페인 성분을 거의 제거한 디카페인 커피가 있다. 특히 디카페인 커피는 주로 저녁에 일할 때 찾는 음료인데, 카페인의 각성 작용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디카페인 커피의 복용법은 ‘원효대사 해골물’이다. 마시는 순간마다 이 검은색 탄맛 물은 진짜 커피일 따름이라고 세뇌하면 된다.
흥미로운 건 커피의 진위를 가르는데 맛 얘기는 빠져 있다는 거다. 나도 커피의 진정한 맛은 원두의 원산지나 품질, 로스팅이나 그라인딩 방식보다도 커피를 마시는 맥락에서 추출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단지 관념론이 아니다. 일하는데 줄곧 입에 머금은 커피가 맛이 없으면 화가 날 때도 있다. 아로마니 보디감이니 커피 소믈리에 납신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2천원도 안 되는 테이크아웃 커피나 편의점에서 내려 먹는 커피의 맛이 세계 상위권인 것도 나 같은 사람이 많아서다.
반면 작업용 노트북 따위는 방에 떨궈두고, 코딱지만 한 미니백을 메고 집을 나서서 평소에 봐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햇살이 비치는 통유리창 너머 시티뷰를 내려다보며, 쫓기는 마감 일정도 딱히 없으면서 예쁜 유리잔에 홀짝이는 아메리카노? 그럴 때 마셨던 커피의 맛은 기억에 거의 없다. 반가운 사람들과 함께 수다 떨며 곁들이는 커피도 그렇지 않은가.
요즘 유행하는 ‘갓생’(god+生)을 살려면 진짜 커피를 마실 틈이 없다. 회사에선 할 일들을 해치우기 위해서(탕비실엔 맥심 믹스커피 혹은 좀 신경 썼다 하면 카누가 비치돼 있기도 하지만, 회사맛(?)이 나서 잘 마시지 않는다), 퇴근하고 나선 스타벅스에 출근해 다음 커리어를 위해 성취해야 할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 카페인이 필요하다. 갓생러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진짜 점심 말고 가짜 점심을 먹는다. 점심시간에 점심만 먹는 게 낭비라는 거다. 점심시간이 되면 15분 만에 밥을 먹고 직장 근처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거나, 당근마켓을 통해 물건을 사고팔아 용돈벌이를 하는 문화도 있다고 한다. 보통 독기가 아니다.
가짜 커피 과다 복용 때문에 생긴 부작용일까? 점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미국 작가 앤 헬렌 피터슨은 책 <요즘 애들>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토요일 아침마다 긴 시간 달리기를 하는 이유가 내가 달리기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달리기가 내 몸을 단련시킬 생산적인 방법이어서인지 헷갈린다. 내가 소설을 읽는 건 소설 읽기를 좋아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기 위해서일까?” (피터슨도 분명 가짜 커피러일 것이다.) 갓생을 위해 커피를 마시는 일 하나에도, 점심을 먹을 때도, 취미나 휴식 시간 때조차 끊임없이 생산성과 쓸모를 생각하는 습관 탓에 진짜 삶을 산다는 감각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계속)
글·사진 도우리 작가
*청춘의 겨울: 언론에서 청년문화를 다루는 방식이 ‘봄’이라면 이 칼럼은 ‘겨울’입니다. 지금, 여기, 청년이 왜 데이트앱, 사주, 주식 등에 빠지는지를 서른이 된 도우리 작가가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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