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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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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몸’은 없고 일머리만

랜선 사수 중독기 ② 사내 스터디와 샐러던트의 탄생
등록 2022-04-28 03:10 수정 2022-04-28 12:03
한 회사 사이트에 게시된 카드 메시지(왼쪽). 책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 인터넷 화면 갈무리

한 회사 사이트에 게시된 카드 메시지(왼쪽). 책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 인터넷 화면 갈무리

나는 ‘일머리’가 없는 편이다(그러나 많이 나아졌다고 믿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를 알려주면 당연히 하나만 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터에 직접 나서보니 일 하나를 제대로 해내려면 일의 전체적인 맥락을 읽고, 그 일과 엮인 사람들의 역할과 관계를 이해하고, 문제 해결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다양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하지만 일머리가 우리가 보통 말하는 ‘뇌’일 리 없다. 존경심까지 드는 뛰어난 일머리의 소유자를 제외하곤, 현장에서 일을 다루면서(특히 사내 화장실에서 눈물 한번 쏟아보면) 일머리가 자라게 돼 있다. 일머리를 키우는 핵심 중 하나가 조직 내 사수다. 일머리가 ‘공부 머리’와 구분 짓는 개념인 것처럼, 일이란 게 단지 수능 인터넷강의 듣듯 지식만 쌓는다고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머리에는 현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낄 ‘일 몸’이 필요하다.

요즘엔 ‘일 몸’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 일머리만 떠다닌다고 생각하니 으스스한데, ‘일 몸’이 발 뻗을 자리가 없어졌다.

“실력은 연차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제 조직 내 직함이나 경력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임시직이 일반화되는 걸 넘어 업무별로 노동자가 투입되는 ‘프로젝트 노동’이 떠오르고, 공무원조차 호봉제가 폐지되는 건 시간문제가 되고 있다. 또 방부제를 아무리 쳐도 지식의 유통기한이 점점 짧아지다보니 과거 지식을 버리고 새 지식을 흡수하는 ‘러닝 커브’(Learning Curve)가 가파른 사람이 핵심 인재상이 됐다.

전통적으로 평균적인 노동자를 키워내던 대표적인 두 기관인 공교육과 대학 교육은 점점 무능해지고 있다. 대학교는 이미 스펙을 쌓는 취업 전문 기관을 자처한 지 오래지만, 취직 뒤에도 사내 스터디에서 계속 공부해야 살아남게 됐다. 노동자의 현재 업무 스킬과 일터에서 요구하는 역량의 간극을 뜻하는 ‘스킬갭’(Skill Gap)이 시대의 문제가 됐다. 이 간극을 채우기 위해 ‘랜선 사수’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마이크로크리덴셜’(Micro-credential·모든 학습과 관련된 경험을 데이터화해, 이를 통해 실무 역량을 인증해주는 교육과정) 같은 에듀테크(Edutech) 시장의 일부일 뿐이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다”라지만, 업무를 위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쏟고 있다. ‘공부하는 직장인’을 뜻하는 ‘샐러던트’(Saladent)라는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다.

그러나 차가운 직사각형 모니터의 몸을 가진 랜선 사수들에게 아무리 ‘디지털 생활비’를 지급해도 내 업계에서 어느 곳이 ‘진상’ 거래처인지, 그 거래처와 접촉할 때 예민하게 챙겨야 할 사항이 뭔지, 그 거래 담당자가 원래 이렇게 답장이 느린 편인지, 그래서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계속)

도우리 작가

*청춘의 겨울: 언론에서 청년문화를 다루는 방식이 ‘봄’이라면 이 칼럼은 ‘겨울’입니다. 지금, 여기, 청년이 왜 데이트앱, 사주, 주식 등에 빠지는지를 서른이 된 도우리 작가가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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