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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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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수는 사무실에 없다, 랜선에 있다

랜선 사수 중독기 ① ‘경력 같은 신입’ 다음, ‘신입 같은 경력’의 시대
등록 2022-04-04 13:34 수정 2022-04-05 10:55
인터넷의 ‘랜선 사수’ 관련 광고들. 화면 갈무리

인터넷의 ‘랜선 사수’ 관련 광고들. 화면 갈무리

분명 가습기를 두 대나 틀어놨는데도 입안이 바싹 마르는 사무실(모든 사무실은 건조하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인수인계 폴더와 5년 전 서류까지 뒤져봐도 도저히 이번에 팀장에게 반려된 기획서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제야 내게 친절하고 유능한 사수가 있다는 걸 떠올린다. 항상 출근길과 잠들기 전에 꼬박꼬박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며 살펴주는 그 사수다. 사수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기다렸다는 듯 노트북을 열며 기획의 기본부터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 노트북 화면으로 고개를 빼는데, 사수가 친절히 팝업창을 띄운다. “보려면 6만 6천원, 이번 달까지만 할인해서. 참, 지금이 가장 저렴해요!”

한 업체의 ‘기획 잘하는 랜선 사수 노트북 엿보기’ 콘텐츠를 보고 떠올랐던 상황극이다. 하지만 많은 독자는 현실이 더하다고 생각할 거다. 나는 “당신 곁의 랜선 사수”를 표방하는 커리어 정보 플랫폼 ‘퍼블리’ 구독은 기본이고 ‘캐럿’ ‘롱블랙’ 같은 마케팅 뉴스레터를 받아 보고, 성인교육 콘텐츠 기업 ‘콜로소’에서 ‘틀을 깨는 힙한 그래픽 디자인과 브랜딩 실무’를 수강하고, 코딩교육 콘텐츠 기업 ‘코드잇’에서 ‘프로그래밍 시작하기 인 파이썬’을 결제해뒀다. 강의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아 실무자에게 직접 코칭을 받는 “목적지는 부장님이 칭찬행”을 광고문구로 내건 전문인력 중개 플랫폼 ‘크몽’도 가입했다. 책장에는 <일잘러를 위한 이메일 가이드 101> <함께 자라기> 등 실무 관련 서적이 꽂혀 있고, 구글 크롬 북마크 바에는 문서 기반 협업툴 ‘노션’, 디지털 화이트보드 ‘Miro’ 등을 즐겨찾기 해뒀다.

이런 랜선 사수들을 통해 파일 관리 노하우부터 이메일 세팅, 기획서 작성, 업계 용어, 상사와 소통하는 팁, 심지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부터 ‘직장인 자존감’ 끌어올리는 법까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랜선 사수에게 낸 돈을 월급 비율로 따지면… 자세히 생각하고 싶지 않고, 어쨌든 내 ‘핵심 직무역량 오각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됐다. 성취감도 올랐다. 무엇보다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는 ‘눈칫밥’을 덜 먹어도 됐다. 대신 내 시급에 맞먹는 ‘구독밥’을 내야 하지만.

그렇지만 요즘 이런 노력은 남들도 다 하는 ‘디폴트’(기본)다. 내가 마케터나 디자이너가 아닌데도 그렇다. 애초에 내가 랜선 사수를 찾게 된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소통이 안 됐던 경험 때문이다. 이들은 마케터나 개발자, 경영자도 아닌데 랜선 사수를 두고 있었다. 기업은 용어를 다 배우고 들어온 경력 같은 신입을 요구한다 했던가? 경력의 상향평준화로 경력을 가지고도 신입 같은 불안에 시달리게 된 것 같다.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는 브런치북 프로젝트 대상 수상작으로 출간된 책이다. 이 책 리뷰 중 한 추천의 말. “회사에 들어오는 신입사원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책입니다.” 사무실에는 사수가 없으니 스스로 사수가 되라는 이 책이 ‘선물’이 되는 시대다. 대체 누가 내 사수들을 랜선으로 옮긴 걸까? (계속)

인터넷의 ‘랜선 사수’ 관련 광고들. 화면 갈무리

인터넷의 ‘랜선 사수’ 관련 광고들. 화면 갈무리

도우리 작가

*청춘의 겨울: 언론에서 청년문화를 다루는 방식이 ‘봄’이라면 이 칼럼은 ‘겨울’입니다. 지금, 여기, 청년이 왜 데이트앱, 사주, 주식 등에 빠지는지를 서른이 된 도우리 작가가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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