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 자료
치명적이었던 여자들을 알고 있다. 한 친구는 학창 시절 전학을 갔을 때 전교 남학생들이 그 한 소녀를 보려 몰려들고, 인기 많은 선배가 애인으로 점찍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드라마나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 그리고 내가 열망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내가 치명적이고자 했던 열망에는 여러 욕망이 한데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관심 있던 사람의 마음을 온통 나에게로 붙잡아두고 싶었던 소유욕, 주변 사람들이 마법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길 바랐던 권력욕, 그냥 지겨운 마음에 조금 나쁘더라도 무슨 일이든 벌어졌으면 하는 권태로움, 이런 것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아무튼 이 세계에 한 줌의 존재감을 쥐길 바랐던 마음.
그런데 그 여자들은 동시에 더는 치명적이고 싶지 않은 여자이기도 했다.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던 건 물론이고 집단 괴롭힘의 대상이 되거나, 선생님들조차 그 소녀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 괴롭힘에 가세했다고 한다. 또 학창 시절 인기 있는 선배에게 애인으로 지목됐던 친구는 실은 그 선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인기 있는 선배를 응원하는 주변 남자 선배들 때문에, 그 선배를 좋아하는 여자 선배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했는데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치명적인 여자들은 그 자신에게 치명적인 사람이었다.
영화 <엑소시스트>(사진)가 소녀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부장 사회의 두려움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리건’은 평범한 소녀였지만 초경 이후부터 이상한 행동을 한다. 손님들 앞에서 욕설을 내뱉으며 오줌을 싸버리거나, 온몸의 관절을 꺾어대고 급기야 목을 360도 돌리는 등. 의사들은 리건에게 ‘일반적인 사춘기 소녀들의 증상’이라고 진단하지만, 결국 통제되지 않자 사제가 “악마에 씌었다”고 선고하고 구마 의식을 진행한다.
생리를 시작하거나 성을 알게 된 소녀가 주변을 휩쓸게 된다는 설정은 영화 <캐리> <장화, 홍련> <곡성> 등에도 나온다. 아주 거슬러 올라가면 이브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뒤 벌을 받게 된 창세기까지.
친구들의 경험 그리고 이 영화들을 보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치명 플레이리스트’에서 말하는 것처럼 달콤하기보다 고통스럽고 성가신 쪽이다. 한 공동체 혹은 조직의 구성원 모두가 들고일어나 통제하려 들거나, 불결하거나 괴이하다고 낙인찍어 사회적 생존을 위협하거나, 그 과정에서 폭력을 가하고도 먼저 유혹했다고 하거나. 한편으로 ‘치명의 대명사’인 영국 드라마 <스킨스>의 에피처럼 심하게 젊고 아름답지 않으면 욕망을 드러냈을 때 ‘치명적인 척’이라고 조롱받거나. 그러면서도 이런 욕망이 없으면 미성숙하거나 가치 없는 존재가 되거나.
그래서 ‘치명적임’을 잘 단속하면 될까? 한 친구는 자신을 위협하는 상황에 넌더리가 나 삭발까지 했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고 한다.
페미니즘을 안 이후로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면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다른 경로와 욕망의 빛깔을 더듬으려 했다. 그런데 최근에 ‘치명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는 제대로 치명적이고 싶어졌다. (계속)
도우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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