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농사는 결국 김장에 가닿는 여정이다. 그 여정의 8할은 고추와의 관계 맺음이다. 고추, 늦봄부터 여름에 걸쳐 재배하는 대표적인 양념 재료. 장모님은 텃밭을 시작하며 ‘우리 김장 고추 자급 원년’을 선언하셨다. 최소 서른다섯 근은 나와야 한다고 했다. 고운 고춧가루 서른다섯 근이 얼마나 무겁고 고단한 것인지 처음에는 당연히 가늠하지 못했다. 사실, 장모님도 고추농사는 처음이라 몰랐던 것 같다. 우리는 고추를 무려(!) 180주나 심었다.
180주의 고추를 외줄이 아니라 두 줄로 심었다. 무엇이 중요한지 정말 1도 몰랐단 얘기다. 비극의 시작. 다 자란 고추는 1m까지도 자란다. 사방으로 고추가 열리는데 두 줄로 심긴 고추를 따려면 곱절의 노력이 필요했다. 두 줄로 심긴 고추밭은 농업인의 허리 통증 완화에 노벨상급 기여를 했다는 작업의자도 무용하게 하는 노동 참사의 현장이었다.
흔히 고추를 ‘농사의 만렙(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초록으로 달린 고추가 고운 빨간 고추가 되려면 칼슘이 충분해야 하고 탄저병을 피해야 한다. 이 과정에 무퇴비, 무농약은 통하지 않는다. 초록 고추 허리에 노란 점이 생기거나 고추 끝이 까맣게 타들어간다면 이미 때는 늦었다. 기후변화에 대비한 선제적 조치만이 고추를 살린다. 고추는 비바람에 약하고, 병충해에도 취약하다. 비가 오면 물컹한 것이 떨어지고, 온갖 벌레에 구멍이 난다. 장모님은 비가 안 오면 고추 탄다며 물을 줘야 한다고 걱정했고, 비가 오면 고추가 물러 상할까 염려했으며, 상해서 떨어진 고추들이 벌레를 꼬이게 할까 노심초사했다.
그렇게 살아남아 황홀한 변색 과정을 거쳐 오동통한 빨간 고추가 맺히면 진짜 문제는 그때 시작된다. 후끈한 날씨에 고추를 따다보면 목덜미에서 시작된 티셔츠의 땀자국이 배꼽 근처까지 내려앉았다. 통증은 허리에서 시작돼 손목으로 번지는데, 이때 허리 한번 펴보겠다고 땀 닦다가 눈 비비면 온몸에 통각이 번진다.
딴다고 끝나느냐. 아니다. 따면 씻어야 한다. 강력한 물줄기로 고추를 자동 세정해주는 기계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초심자는 그 모든 과정을 다 제 손으로 해내야 한다. 대형 플라스틱 대야와의 사투, 물과 고추의 일체 그게 바로 물아일체다. 그러고는 말린다. 습기가 사라지면 그때부터는 ‘태양초’를 향한 새로운 여정이다. 너르게 펼쳐 말리다 뒤집었다가 날씨 흐려질 것 같으면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가 기상예보와 달리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시 펼쳤다가 밤에 거둬야 한다. 그걸 계속한다. 반복한다. 또 한다. 이쯤 되면 하루 24시간, 지구의 자전이 온통 고추를 중심으로 펼쳐진 게 아닐까, 그래서 그 이름이 찬란하게도 태양초가 아닐까 하는 망상에 젖게 된다.
열리고 또 열리고 다시 열리고, 씻고 말리고 뒤집고. 고추와의 항쟁 끝에 그래서 몇 근의 고추를 얻었느냐고? 서른세 근 남짓이다. 올해 태양초 고추 가격은 한 근에 2만원 안팎이다. 내년에는 사먹야 하는 걸까. 장모님은 우리 먹을 것 나왔으면 됐다고, 세상에 이렇게 깨끗한 고춧가루는 없다고 했다. 그런가. 어느 날 빨간 고추를 널어놓고 맥주를 한 잔 마셨다.
글·사진 김완 <한겨레> 탐사기획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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