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만화를 무척 좋아한다. 어느 점심시간에, 웹툰 피디님 한 분이 하도 집중해서 태블릿피시를 들여다보고 있기에 무얼 그리 열심히 읽으시나… 하고 봤더니, 엄청나게 파이팅 넘치는 격투 만화를 보고 계신 게 아닌가. 아무래도 여자가 이렇게 선이 굵은 만화를 보는 경우가 워낙 드문지라 내가 짐짓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피디님께서 “아, 제가 덕질 돌잡이를 <더 파이팅>이라는 격투 만화로 해서요…” 하고 수줍게 말씀하셨다.
잠깐, 뭐라고요? ‘덕질 돌잡이’요? 아니, 이렇게 귀여운 표현이 존재한다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직원들도 하던 덕질(?)을 내려놓고 그 단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덕질 돌잡이, 그러니까 내가 처음 덕질을 시작하게 만든 만화나 소설 등을 일컫는 그 깜찍한 표현이 주는 유쾌함 때문에 우리는 점심시간을 꽉 채워서 대화를 나누었더랬다. 각자의 돌잡이 작품은 소년 격투 만화부터 마법소녀가 등장하는 로맨스 판타지 만화까지 그 스펙트럼이 무척 넓었다.
내 덕질 돌잡이 작품은 단연코… <카드캡터 사쿠라>다. 국내에서는 1999년 <카드캡터 체리>라는 제목을 붙인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첫선을 보였는데,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37%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마 내 동년배 중에 체리를 모르고 자란 여자아이는 없을 것이다. 주인공 사쿠라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크로우 카드를 수집하기 위해 마법소녀로 활약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만화에는 놀랍게도 내가 지금까지 고수하는 취향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아기자기한 그림체, 세계관이 탄탄한 로맨스 판타지, BL(보이스 러브) 및 GL(걸스 러브) 요소가 골고루 섞인(?) 장르의 다양성까지. 아마 처음으로 사 모은 만화책도 <카드캡터 체리>일 것이다.
이 작품을 떠올리고 있자면, 엄마가 내 책장의 만화책을 처음으로 찢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책장 맨 아래칸에 신줏단지 모시듯 한 권씩 모아둔 만화책들을 싹 끄집어내서 당장 갖다 버리라고 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막으며 눈물 콧물 쏙 뺐던 10대 시절의 내가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피실피실 웃음이 난다. 그렇게 만화 때문에 엄마랑 지지고 볶았는데, 그 딸내미가 어른이 돼서 만화책을 만들고 있다니. 가끔 전화할 때마다 ‘일이 너무 많다’는 말을 달고 사는 딸을 보며 엄마는 매번 묻는다. “너 그렇게 만화가 좋으니?” 그럼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좋으니까 맨날 이렇게 사서 고생하지!”
6월에 이어 8월에도 웹툰 단행본을 한 권 냈다.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교정 교열 사항을 하나도 체크하지 못한 채로 교정지가 휙휙 넘어갈 만큼 흥미진진한 만화였다. 예약판매가 시작되고, 다행히도 기대 이상으로 독자들의 반응이 열렬했다.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항상 독자들이 온라인서점이나 트위터 등에 남긴 기대평을 찬찬히, 거의 닳도록 읽는다. 그러면 가슴 한가운데에서 따뜻한 기운이 간질간질하게 퍼진다. 행복한 기분이 손에 잡힐 듯 몽글몽글하게 내 몸을 감싼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많은 사람이 함께 좋아해주는 행위에서 오는 안락한 행복. 매번 책을 낼 때마다 나는 이름 모를 사람들과 으쌰으쌰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덕질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앞으로도 나는 내 손을 거친 책의 권수만큼, 아니 그것의 두 배, 세 배의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음 달, 그다음 달의 나는 얼마나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유선 디앤씨웹툰비즈 편집자
*책의 일―웹툰 편집자 편 마지막 회입니다. 수고하신 유선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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