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머니가 눈병을 앓았는데 ‘서산(인왕산)에서 영험한 샘물이 나와 눈병 앓은 사람들이 그 물로 씻으면 곧 낫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곧 날을 잡아 가봤다. (…) 두 번이나 쉬고 난 뒤 샘물이 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인왕산 중턱쯤이었다. (…) 물맛은 달고 냄새가 없었으며 아주 차지 않았다.”(김상헌, ‘서산에서 놀다’, 1614년)
2019년 2월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60 집 뒤편 바위에서 ‘옥류동’(玉流洞)이란 각자(새긴 글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각자는 조선시대 서인 노론의 지도자인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류동은 옥빛의 맑은 물이 흐르던 이 골짜기의 옛 이름이다. 옥인동은 1914년 일제가 ‘옥류동’과 ‘인왕동’(수성동)을 합쳐 만든 지명이다.
이 각자는 이 일대의 오랜 소유자 집안이던 장동(신안동) 김씨 김학진의 <일양정기>(1913)에도 나오고 언론인 김영상이 쓴 ‘서울 6백년’ 연재 기사(1959년)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일대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옥류동’ 글씨는 거의 6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옥류동은 조선 후기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는 조선 후기 최대 권력 가문인 장동 김씨의 터전이었다는 점이다. 둘은 조선 후기 사회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른 중인들의 무대였다는 점이다.
장동 김씨 가운데 옥류동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좌의정 김상헌(1570~1652)이다. 1636~1637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협상할 수 없다며 강경론을 이끌었던 그 사람이다. 당시 김상헌은 현재 청와대 옆 무궁화동산 자리의 ‘무속헌’(속됨이 없는 집)에 살았는데, 앞의 글처럼 어머니의 눈병을 고치기 위해 1614년 인왕산 옥류동의 샘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상헌은 이 샘을 찾아갔을 뿐 이곳에 집을 짓지 않았다. 여기에 집을 지은 사람은 김상헌의 손자 영의정 김수항(1629~1689)이다. 김수항은 1683~1684년 옥류동에 ‘육청헌’(여섯 그루 사철나무 집)이란 살림집을 마련했고, 1686년엔 샘 부근에 ‘청휘각’(날이 개고 빛나는 집)이란 정자를 지었다. 육청헌은 여섯 아들이 모두 성공하길 바란 집이고, 청휘각은 자신의 휴식 공간이었다.
당대 서인 노론의 리더인 김수항이 청휘각을 짓자 이웃이자 판서인 남용익(1628~1692)은 ‘청휘각에서 함께 노는 즐거움을 적어 김수항 재상께 드린다’는 시를 써줬다. “옥류동 연기와 노을 속에 비경이 열리니, 높은 청휘각에 먼지가 끊어졌다. (…) 놀러온 사람은 돌아갈 것을 잊고, 처마 앞에 머물며 달 뜨기를 기다린다.”
남용익의 시를 선물받은 김수항도 시로 화답했다. “층층 벼랑 중턱에 작은 정자를 지으니, 동쪽의 번화한 곳에서 멀리 떨어졌다. (…) 이제부터 이 골짜기에 물색(풍경)을 더할 테니 사람들은 소중하게 시를 보내오라.”(‘옥류동의 우리 집에 새로 청휘각을 지었는데 제법 물과 돌이 아름답다’)
‘옥류동’이란 바위 각자는 바로 이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과 김수항은 서인 노론의 지도자이자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다. 1689년 남인의 정권 교체(기사환국) 때 후배 김수항이 먼저 사약을 받자 역시 사약을 받으러 서울로 오던 선배 송시열이 그의 묘지명(죽은 이의 삶을 돌에 새겨 무덤에 넣는 것)을 써줄 정도였다. 따라서 ‘옥류동’ 각자를 송시열이 살아서 쓴 것이라면 김수항이 육청헌을 지은 1683년에서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약을 받은 1689년 사이일 것이다.
김수항의 죽음 뒤 육청헌과 청휘각을 물려받은 이는 큰아들 김창집과 손자 김제겸이었으나, 1715년 넷째 아들 김창업(1658~1722)에게 넘어갔다. 아버지가 사약을 받은 뒤 김창업은 벼슬길을 끊었다. 대신 <연행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특히 이 집을 넘겨받은 김창업은 증조부 김상헌이 100년 전에 찾은, 집 뒤의 샘물을 즐겨 마셨다. 그 뒤로 이 샘은 그의 호를 따라 ‘가재우물’이라고 불렸다.
1715년 이 청휘각을 고친 뒤 김창업이 쓴 시는 슬프다. “아버지가 맡긴 집이니 아들이 어찌 조급하게 하랴. 무너진 집을 일으키자 사람들 모두 좋아하는데, 서글픈 마음에 나 홀로 술이 깼네. 단풍나무와 소나무를 반드시 공경할지니, 도끼가 찾아들지 않게 해야겠네.”(김창업, ‘셋째 형에게 화답해서 청휘각 완공의 슬픈 마음을 적다’, 1715년)
이 시는 1689년 남인 집권으로 사약을 받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을 담았다. 또 아버지의 죽음으로 성큼 다가온 그 집안의 일상적 ‘불안’을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런 불안은 또 다른 참극으로 이어졌다. 아버지의 죽음 뒤 재기했던 그의 큰형 영의정 김창집과 그 아들 김제겸, 그 손자 김성행 등 3대가 1721~1722년 신임사화 때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한편 1686년 김수항이 청휘각을 지은 지 꼭 100년 뒤 옥류동에 새바람이 불었다. 장동 김씨, 의령 남씨 등 권력 가문이 독차지했던 옥류동에 중인이 몰려들었다. 그 선두 주자는 옥계시사(옥류동 시모임) 또는 송석원시사(송석원 시모임)를 만들어 활동한 중인 문인 천수경, 장혼 등이었다. 옥계는 옥류동과 같은 뜻이며 옥류, 옥천, 옥동, 옥류천으로도 썼다. ‘송석원’(소나무와 돌 정원)은 천수경이 붙인 옥류동의 다른 이름이며, 그의 호이기도 하다.
이들은 옥류동 천수경의 초가에 모여 시를 짓고 그 모습을 그려 그림시집을 만들었다. 대표 작품이 <옥계십이승첩> <옥계청유첩> <옥계십경첩> 등이다. 시모임 참가자는 1786~1791년 9~15명이었으나, 1812년엔 50여 명까지 크게 늘어났다. 그즈음 수백 명이 참여하는 ‘백전’(白戰, 시쓰기 대회)도 열렸다.
이들의 시모임을 김홍도나 이인문 같은 유명 화원(국가 공인 화가)이 그렸다. 당시 중인의 경제력이 커졌고 이 시모임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장 유명한 그림은 이인문의 <송석원 시회도>,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다. 두 그림 모두 1791년 유월 보름날 시모임을 그린 것이다.
심지어 중인 문인들은 1817년 왕가의 사위 집안 출신으로 가까운 월성위궁에 살던 젊은 김정희를 초대했다. 그에게 부탁해 자신들의 활동 공간이자 모임 이름인 송석원(松石園)을 옥류동의 한 바위벽에 새기게 했다.
송석원 세 글자는 이 시기 옥류동에서 중인이 장동 김씨나 사대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청휘각을 소유했던 장동 김씨 김학진은 ‘일양정기’에서 이곳을 ‘옥류동 송석원’이라고 썼다. ‘옥류동’은 장동 김씨가 역사에 새긴 이름이고, ‘송석원’은 중인이 역사에 새긴 이름이다.
굵고 깊은 김정희의 송석원 각자는 송시열의 옥류동 각자처럼 1959년 김영상이 찍은 사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김영상은 연재 기사를 묶은 책 <서울 6백년> 1권에서 이 송석원 각자가 “집을 짓느라 그 바위를 깨뜨리는 통에 없어져버렸다”고 썼다. 그러나 이 글씨가 남았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역시 개발 과정에서 훼손된 것으로 추정한 옥류동 각자가 2019년 발견됐기 때문이다.
송석원 각자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옥인동 47-253번지 집의 콘크리트로 바른 바위벽이다. 이곳이 윤덕영의 벽수산장(양옥 본채, 없어짐)과 소실 이성녀의 한옥 별채(남아 있음)와 가까이 있고 옥류동천 바로 옆이며 바위벽이 높다는 점 등이 근거다.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전 한양대 교수)은 “바위벽의 옆과 위에 집을 지으면서 콘크리트를 발랐는데, 비파괴 조사를 하면 찾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2020년 말 서울시의 비파괴 조사에선 이곳에서 각자가 확인되지 않았다. 서울시 김장수 주거환경개선과장은 “각자의 위치를 잘못 추정했을 수도 있고 콘크리트를 발랐을 때나 그 뒤에 훼손됐을 수도 있다. 전문가 의견을 들어 다른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송석원 각자가 옥류동이 아니라 언덕 너머 수성동 쪽 박노수미술관(윤덕영 딸의 집) 뒤쪽에 있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 이인문의 <송석원 시회도>를 보면 송석원이란 글씨가 박노수미술관 뒤쪽으로 추정되는 바위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김한배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이 그림의 배경을 보면, 이 그림의 물길은 옥류동천이 아니라 수성동천”이라고 말했다.
송석원 각자와 함께 옥류동에 있던 김수항의 청휘각이나 육청헌, 김창업의 가재우물의 위치도 오랜 관심거리였다. 윤덕영과 동생 윤택영의 글을 보면, 김수항의 청휘각 자리에 일양정(윤덕영 한옥 본채)이 세워졌고, 일양정 뒤에는 가재우물과 옥류동 각자가 있었다. 그런데 옥류동 각자(옥인동 47-360)와 일양정(옥인동 47-73)의 위치는 확인된다. 따라서 가재우물도 이 언저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육청헌은 사라진 지 오래돼 위치를 찾기 쉽지 않다.
2021년 6월, 옥류동 각자가 발견된 옥인동 47번지 일대는 골목길을 너비 4m 도로로 넓히는 서울시 주거환경개선 사업이 한창이다. 이 사업이 끝나면 60년 만에 나타난 옥류동 각자도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서울시는 2021년 말까지 이곳에 옥류동 각자를 보여주기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문헌:
김한배, 서울 서촌 지역 조선조 원림의 위치 추적을 통한 경관 해석, 2014
김해경,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 정원의 조영 기업 해석, 2016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서울>, 혜화1117, 2020
허경진, 문학 작품에 나타난 서촌의 모습.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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