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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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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일] 책 오류 잡는 독자

1년에 약 50권 읽으며 정오표 만들어 출판사에 보내
등록 2021-01-04 00:17 수정 2021-01-07 17:24
정오표를 만드는 독자 최재근씨의 인생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지음, 햇빛출판사, 1988

정오표를 만드는 독자 최재근씨의 인생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지음, 햇빛출판사, 1988

2016년부터 알게 됐다. 책을 많이 내는 만큼 그에게서 오는 전자우편 횟수도 늘었다. 제목은 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였고, 최신간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라 민망했던지 가끔 ‘죄송합니다’란 제목을 달기도 했다. 나는 이 독자 최재근씨가 누구인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 한 그는 퇴직 뒤 남는 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책을 열심히 사 모았다(연 150만원 내외). 고르는 기준은 첫째 관심 분야, 둘째 구독 중인 신문의 서평, 셋째 좋아하는 출판사의 신간이다. 인문학을 즐겨 사계절, 돌베개, 책과함께, 창비, 까치, 한길사, 민음사, 서해문집, 푸른역사, 글항아리의 책을 주로 읽는다.

그는 타고나길 꼼꼼한 성격이었다. 업무가 각종 보고서와 자료를 보는 일이다보니 잡다한 지식까지 생기면서 더 꼼꼼해졌다. 1차 사료나 원서를 읽지 않고도 내용상 인과관계나 배경지식으로 책 내용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는 이유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권했다. “읽은 책의 오류를 정리해서 SNS와 유튜브에 올려보지?”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어려운 생태계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정오표를 작성해 출판사가 더 좋은 책을 만들도록 전자우편으로만 소통하는 이유다. 그런데 나름 정성 들여 보낸 전자우편에 답신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는 그만 겸연쩍어져서 그 출판사 책은 덜 사게 된다고 한다(나 역시 다른 출판사 책의 정오표를 만들어 보낸 적이 있는데 답신을 못 받았고, 그 뒤로 그런 일은 그만뒀다).

보통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고 사고의 획기적 발전과 전환이 일어난다고들 한다. 그는 책을 읽으며 이런 실용적 동기가 될 만한 요소를 찾으려 했지만 그렇게는 잘 안 되었고 책 자체를 읽는 게 그냥 즐거웠다. 매일 8~9시간쯤 읽고 주말에는 건강관리를 위해 100㎞쯤 자전거를 탄다. 책 소개글을 읽으면서 막걸리 한잔하는 것도 그의 낙이다. 추사가 스스로의 즐거움을 표현하면서 현판에 “일독(一讀) 이호색(二好色) 삼음주(三飮酒)”라고 쓴 것을 흉내 내 그는 “일독(一讀, 책읽기) 이륜(二輪, 자전거 타기) 삼주(三酒, 술 마시기)”를 낙으로 삼고 있다.

1년에 100권을 읽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가 시도해보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역사책을 주로 읽는 그는 정독하는데다 사실관계를 따져가면서 보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많아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검색하며 다 찾아본다.

2018년 45권을 읽었고 2019년 54권으로 늘어 2020년의 독서량을 기대했는데, 그만 어머니가 아프셔서 병간호하는 데 시간을 쓰는 바람에 책 읽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살면서 계획대로 시간을 쓰기란 쉽지 않다. 내 몸과 마음이 말썽을 일으킬 때도 있지만, 노부모를 둔 자녀는 상당 시간을 그들을 돌보는 데 쓴다.

퇴직자라면 혼자 있는 외로움을 달래려 독서 모임을 만들 법도 한데, 그는 혼자 읽는 게 익숙해 독서 토론은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가족 중에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내와 엔지니어인 아들은 책하고 인연이 없다. 다행히 딸이 책 관련 업종에 종사해 행운으로 여긴다.

애서가인 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요즘 출판사들이 교정 교열을 좀 등한시하는 것 같은데 신경 써주시면 안 될 까요?”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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