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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내면의 ‘천사’를 쫓아낸 여성 화가들

이유리의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등록 2020-12-26 14:58 수정 2020-12-27 02:03

다부진 눈매, 앙다문 입술, 삐딱하게 치켜든 턱. 그림 속 그녀는 다르다. 흔히 캔버스에 재현되는 여성의 표정이 아니다. 눈에 띄게 아름답지도, 슬프게 보이지도, 관능적이지도 않다. 그림 속 주인공은 중국 최초의 여성 유화가 판위량이다. 프랑스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했던 최초의 중국 여성 화가다. 그녀는 어릴 때 유곽에 팔려가 기생으로 일했다. 중국 사회는 그녀의 과거를 조롱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견디다 못해 이듬해인 1937년 중국을 떠났다.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한겨레출판 펴냄)의 표지는 판위량의 자화상으로 꾸며졌다. 책에 잘 어울리는 얼굴이다. 이유리 작가는 “여성 예술가들이 그들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천사’를 쫓아내는 과정”을 좇았다고 썼다. ‘천사’란 “착한 딸, 어진 아내, 현명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가부장 사회의 압박에 억눌린 여성을 뜻한다. “가부장 사회가 얼마나 여성 예술가들을 옭아맸는지를 기록한 고발물”인 셈이다.

판위량의 자화상이 낯선 이유는 그림 속 표정 탓만이 아니다. 반 고흐, 에곤 실레, 렘브란트 등 수많은 남성 화가의 자화상은 익숙하지만, 유명한 여성 화가의 자화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왜일까.

우리가 그림 속에서 만나는 여성은 이른바 ‘뮤즈’다. 남성 화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여신과 같은 존재. ‘늙고 추한’ 여성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피카소가 그린 <꿈>의 모델은 22살이었던 마리 테레즈다. 피카소는 그녀를 17살 때부터 ‘그루밍’해서 연인이자 모델로 삼았다. 피카소는 열정이 사그라들자, 그녀를 버렸다. 남성 화가의 여성 착취는 예술혼으로 포장된다. 그림 속 여성들은 헌신적인 조력자도 돼야 했다. 42살 자코메티와 결혼했던 20살 아네트는 아틀리에의 석고 부스러기를 몇 자루씩 치우고, 5~6시간씩 앉아 모델 포즈를 취하고, 남편의 글을 다듬고 타자를 쳐줬다.

여성 예술가들의 처지는 다르다. 마리 니콜 베스티에의 자화상 <작업 중인 미술가>에는, 한 손에 붓과 물감을 잔뜩 들고서 다른 한 손으로 아이를 돌보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남편은 그림 밖에서도, 그림 속에서도 ‘천사’의 일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을 게다. 열정을 불태우는 여성은 풍자의 대상이 될 뿐이다. 판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블루 스타킹>을 보면,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엄마 뒤로 지저분한 집 안과 욕조에 처박혀 발만 버둥거리는 아기가 있다. 집안일과 육아를 팽개친 채 자아실현만 꿈꾸는 여성을 비꼰 그림이다.

그림 밖에서 살아가는, 화가가 아닌 여성들의 세상이라고 다를까. 코로나19 퇴치에 빛을 발한다는 ‘여성적 리더십’, 성폭력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피해자다움’ 따위의 말이 오가는 세상인데. 이 책이 여성의 시각으로 그림을 읽어내는 해설서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 비평까지 가닿은 이유이기도 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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