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세일즈우먼] 가게를 열고, 아침 오는 게 무서웠다

사과 팔러 온 금순이를 보고 야무지게 장사하는 법을 연구하다
등록 2020-10-25 22:02 수정 2020-10-30 23:05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기까지 사고파는 일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만 하고 살았습니다. 내 기억으로 중학교 때 학용품 살 돈을 달라고 하니 어머니가 쌀을 한 말 퍼주면서 이고 가 팔아서 쓰라고 했습니다. 이걸 어떻게 팔아야 하나 엄청 근심하면서 장을 향해 갔습니다. 가는 길에 계장리 사는 모곡장사(곡식을 사고파는 사람)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야야 교복하고 안 어울린다” 하시면서 거의 쌀 두어 말 값을 주시며 어서 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시집가서는 강아지 두 마리를 팔아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꽃가마 타고 시집갔던 금순이

스물아홉에 돌 지난 아들과 남편과 또 임신을 한 몸으로 강원도 평창으로 왔습니다. 남편은 공무원을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며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조금 모은 돈으로 학생사라는 서점 겸 문구점을 8월15일에 열었습니다. 주위에는 온갖 물건을 다 파는 만물상 같은 큰 가게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남편도 사고파는 일에 익숙하지는 못했습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가게에 채울 물건이 부족해 선반 위쪽으로 물건을 진열하고 아래쪽은 빈 상자로 채웠습니다. 가게를 열고 한 달 동안은 아침이 오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가게 문을 활짝 열어놓지 못하고 하늘색 커튼을 내려놓고 살았습니다. 어쩌다 사람들이 커튼을 젖히고 들어와 물건을 팔라고 하면 값을 주는 대로 받고 팔았습니다. 가게에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가족이나 아는 사람한테 팔기도 멋쩍었습니다.

물건을 사는 것도 자신이 없어서 장날 어머니가 오시면 사다달라고 해서 썼습니다. 임신 중이라 먹고 싶은 것은 왜 그리도 많은지. 날로 갑갑함이 더해가던 어느 날입니다. 옆집 할머니가 “언나 어멈, 우리 집에 사과 장수가 왔으니 사과 사러 와” 하십니다. 사과 장수는 아직은 이른 때라 사과밭에서 솎아낸 맛도 안 든 파란 사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워낙 사과가 귀한 지방이라 사과는 금세 동이 났습니다. 사과 판 돈으로 갈 때는 자기 마을에서 귀한 무나 배추를 사간다고 합니다.

그 사과 장수는 초등학교 5학년 조회 시간에 교단 뒤로 꽃가마 타고 시집갔던 금순이었습니다. 금순이 아버지는 중매쟁이 말만 듣고 어린 금순이를 시집보냈습니다. 충청도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잣집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시집가서 보니 부잣집 아들이라던 신랑은 과수원집 일꾼이었답니다. 남들은 다 잘사는데 자기들처럼 비천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더랍니다. 다행한 것은 신랑은 없는 것이 흠이지 근면성실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금순이와 신랑은 집을 마련할 때까지 아이도 낳지 말고 돈을 벌자고 약속했답니다. 금순이와 신랑은 과수원 일이며 미장일도 하고 남의 집 설거지도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이제는 집도 사고 땅도 샀습니다.

금순이는 이번 장사를 마지막으로 돌아가면 아이를 가질 거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살 수 있었는지, 금순이처럼 똑똑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금순이가 위대해 보였습니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아이만 덜컥 낳은 내가 너무나도 바보 같았습니다. 그 와중에 새파란 사과는 왜 그리 맛있는지 밤새 사과 50개를 다 먹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가을운동회 ‘똘마니 부대’에 끼다

어버버하며 한 달이 지나니 주위 가게들이 파는 시세도 알고 파는 일에도 자신이 생겼습니다. 주위 가게들은 잡화점인데 우리 집은 학생을 상대하는 전문점이다보니, 주변 학교 근방 작은 가게들이 도매로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가게 양쪽으로 대문이 있는 집이었는데, 도매로 달라는 손님이 주문한 물건이 없을 때는 남편이 저기 창고에서 무슨 물건 몇 개를 가져오라 합니다. 그러면 나는 뒷문으로 돌아 다른 가게에 가서 사다주었습니다. 그렇게 손님을 모았습니다.

가을운동회가 가까워오자 평창 장돌뱅이 아줌마들이 장난감 도매를 달라고 모여들었습니다. 자기들끼리는 ‘똘마니 부대’라고 불렀습니다. 이때다 싶었습니다. 나도 똘마니 아줌마들 틈에 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친정어머니한테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뭐 하는데 돈이 필요하냐고 묻는데, 쓸 데가 있으니 한 달만 쓰고 이자 쳐서 줄 테니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친정어머니한테 빌린 돈으로 남편은 충북 제천에 가서 장난감을 해왔습니다.

경로당은 우리 집 앞을 지나가야 있는데 선배 언니 아버지는 우리 집을 늘 들여다보시며 잘되냐고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마침 선배 언니네 오빠가 교육청 과장으로 계셨습니다. 선배 언니네 아버지한테 각 학교 운동회 날을 알아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몇 날 며칠 밤을 밤새워 울면서 연구하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계촌학교 운동회가 그해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아직 자고 있는 아들을 아빠한테 맡겨놓고 이웃 몰래 떠납니다. 새벽 4시에 똘마니 아줌마들과 버스부에 모여 4시30분에 출발하는 차에 각자의 짐을 싣고 계촌으로 향했습니다. ‘전순예, 울어서는 안 돼. 이것은 잘살 수 있는 기반을 닦는 거니 용감하고 씩씩하게 잘해내야 해.’ 먼 산을 바라보며 눈을 껌벅거리고 갔습니다.

장사꾼들이 많이 모이기 전에 도착했습니다. 나름대로 사람이 많이 모이겠다 싶은 곳에 한 평 되는 천막 쪼가리 하나 깔고 장난감 가게를 차렸습니다. 옆에는 열 개들이 껌 두 상자와 과자 한 보따리도 곁들였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유쾌한 운동회가 시작됐습니다. 동네 사람은 남녀노소에 개들까지 다 모였습니다. 나는 잘 불 줄도 모르는 멜로디언을 불었습니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종일 입술이 부르트도록 삑삑거리며 사람을 불러 모았습니다.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오셨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어 장난감을 사주었습니다. 온동네 사람들 다 모여 같이 술 한잔하고 돼지국밥도 먹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기분 좋은 날입니다.

돌아올 때는 개선장군

장난감은 몇 개 안 남고 다 팔렸습니다. 가게에서 거의 한 달 판 것만큼 돈이 모였습니다. 갈 때는 보따리장사를 하는 게 왠지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돌아올 때는 개선장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터질 듯한 버스 속에서 멀미는 왜 그리 나는지 정말로 죽을 뻔하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보니 나보다 한 살 많은 이웃 사는 큰올케가 아들을 데려다 먹이고 빨래까지 다 해서 저녁에 가져다줬습니다. 걱정을 많이 한 남편은 어떻게 다 팔았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누구여, 김영희씨 딸이잖아” 하며 으쓱거렸습니다.

전순예 <강원도의 맛> 저자

*연재를 시작하며: 사람이 사는 건 사고파는 게 근본인 것 같습니다. 문구점, 서점, 빵장사, 세제 방문판매, 그릇과 냄비 외판원 등으로 돈을 벌었던 게 내세울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작은 것들을 사고팔며 살아낸 세월이 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든 일이 많았지만 하다보니 나름의 노하우도 생기고 고객도 생기고 재미도 보람도 있었습니다. 나와 이웃들의 소소한 세일즈 인생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2주마다 연재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