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3월 미국 뉴올리언스 법원은 경찰서장 피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이탈리아 이민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격분한 ‘백인’ 무장 자경단이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a 중이던 용의자 11명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군중은 “하얀 검둥이(white-nigger) 놈들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이때만 해도 남유럽계의 ‘새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백인’ 축에 끼지 못했다.
‘인종(주의)’은 지금도 미국을 이해하는 열쇳말이다. 재미 한인 사회학자 진구섭 맥퍼슨대 교수는 <누가 백인인가?>(푸른역사 펴냄)에서 뿌리 깊은 ‘미국의 인종 감별 잔혹사’(부제)를 폭로한다. ‘인종’이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만들어진 허구의 신화일 뿐이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과 사료를 토대로 치밀하게 논증한다. 지난 220년 동안 미국 인구조사에서 ‘인종’ 범주가 24차례나 바뀐 사실은 ‘인종’ 구분이 얼마나 취약하고 자의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구이민자’인 독일·아일랜드·북유럽계 정착민이 미국에서 ‘백인성’을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이전까지 ‘진정한 백인’은 건국의 주류 집단인 영국계(앵글로색슨) 시민뿐이었다. 그들에게 19세기 말~20세기 초 동·남부 유럽 이민자의 대규모 유입은 ‘인종 습격’이었다. 새 이민자들은 ‘중간 인종’ 또는 ‘견습 백인’으로 분류되고, 남부에 정착한 이탈리아계 자녀들은 한동안 흑인학교에 배정됐다. 유대인도 ‘검은 동양인’ ‘미흡한 백인’이란 멸칭으로 불렸다.
하물며 흑인, 아시아계와 남미 이민자는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가장 중추적인 백인’들은 신(기독교)과 과학과 법에 기대어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온갖 논리를 짜냈다. 제헌의회(1787년)에선 인구 비례에 따른 연방하원 의석수를 놓고 남부-북부 간 논쟁이 붙었다. ‘사유재산’이면서 ‘사람’인 흑인 노예가 문제였다. 고심 끝에 흑인 1명은 백인 5분의 3 몸값으로 낙찰됐다. ‘누가 백인인가’에 못지않은 골칫거리가 흑인 감별법이었다. 이른바 ‘피 한 방울 법칙’(1910년)은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정(1967년)이 나오기까지 최악의 정점이었다. “백인은 다른 피로 오염되지 않은 청정무구의 순혈인간이어야” 했다.
야만적 동양인이 문명화된 유럽을 정복할 것이란 ‘황화론’, 중남미계 이민자를 분류하기 위해 고안된 ‘히스패닉’과 ‘라티노’ 범주, 북미 원주민을 지칭한 ‘인디언’, 심지어 인류의 발생 기원까지 왜곡한 ‘다원 발생설’도 백인의 우월의식에서 비롯한 인종주의의 몸부림이었다. 미국 인종주의 역사를 낱낱이 들여다본 지은이의 눈길은 한국 사회의 다문화가족, 이주노동자, 난민(신청자)의 현실에 가닿는다. 지은이는 “다름에 대한 포용의 폭을 넓혀가는 일, 이는 껍데기를 깨는 일이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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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쓰고, 함께 살다
조정래 지음, 해냄 펴냄, 1만6800원
대하소설 거장 조정래 작가의 ‘등단 50주년 기념 독자와의 대화’ 모음집. 남녀노소 독자 100여 명의 질문에 대한 작가의 응답을 담았다. 1부는 작가의 문학 세계와 삶, 2부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대표작에 얽힌 이야기, 3부는 한반도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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