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이 사랑한 작가 신철규①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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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꽃이 피인 기라, 피가 꽃인 기라
“구야, 참꽃이 코피 쏟아놓은 것맹키로 우째 저리 타오를꼬, 앞산 날망에도 뒷산 골짝에도 천지 삐까린 기라, 한 움큼 따다 입안에 넣으면 헛헛한 속이 달래질라나/ (…)/ 구야, 니는 대처로 나가 살아야 한대이, 가서는 총도 잡지 말고 펜대도 굴리지 말고 참꽃맬로 또랑또랑 살거라이, 나서지도 숨지도 말고, 눈을 부릅뜨지도 감지도 말고, 꽃이 피인 기라, 피가 꽃인 기라”(‘꽃피네, 꽃이 피네’)
“은빛 갈치 같은 것 말이다, 저놈이 바로 이무기란 것이제, 응? 니 눈엔 안 보인다꼬? 이무기는 산 깊숙한 굴에 숨어 살다가 천 년에 한 번 하눌이 열리는 날, 여의주를 입에 물고 올라가 용이 되는 기라, 니캉 내캉 저 우에 올라갈 수 있으면 울매나 좋을꼬, 속이”(‘이무기는 잠들지 않는다’)
신 시인의 또 다른 시들은 그의 원천인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다. 4부 ‘이무기는 잠들지 않는다’에서 신 시인을 ‘구야’라고 부르며 짙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그의 할머니다. 할머니는 6·25전쟁 당시 좌우익의 학살 경험을 바탕으로 신 시인에게 ‘중간을 가라’고 가르친다. 분단과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거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이야기다. 신 시인의 고향은 경남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 용초마을. 경남 거창은 빨치산이 활동했고, 국군의 양민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시인은 할머니의 말을 빌려 꽃이 피는 것을 ‘꽃이 피’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첫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신 시인은 “고향에 계신 할머니께 이 시집이 따스한 안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준 사람이다. 그는 “할머니가 동네 어른들과 좁은 방에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사이에 끼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고 했다. 할머니는 이미 멸종한 호랑이와 늑대를 봤고, 심지어 상상 속 동물 이무기까지 본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새벽녘에 은빛 갈치 같은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앞산 능선을 따라 날고 있었다”고 그에게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시 ‘이무기는 잠들지 않는다’에 스며들었다.
“내 키가 지금의 절반이었을 때 그와 나란히 오줌 눈 적 있다/ 내 눈앞에 그의 거시기가 있었고 그 끝에서 오줌 줄기가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영대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그의 몸을 수건으로 닦다가/ 볼품없이 쪼그라든 그것을 다시 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하늘색 모포로 그의 아랫도리를 덮었다”(‘복수에 빠진 아 버지’)
옛날 아버지들이 많이 그랬듯 신 시인의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살가운 적이 없었다. 맏아들이어서 할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 말을 이기지 못했다. 또래가 모두 도시로, 서울로 떠날 때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신 시인은 “아버지는 농사짓지 않는 겨울엔 석 달 내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욕망은 있었지만 욕망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 시 ‘복수에 빠진 아버지’엔 신 시인의 이런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 있다.
신 시인은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나고 싶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대학을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답답한 시골이 싫었고, 시골에서 일하는 것이 싫었다. 도시의 삶을 동경했다. 막상 대학에 가니 아는 사람도 없고 향수병도 생겨서 한 달에 한 번씩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고향에 가면 이틀을 견디기 어려웠다. “고향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마 모든 작가가 고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5.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대신하는 사람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신 시인에게 시와 시인에 대해 물었다.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시는 느끼는 것이란 주장을 믿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시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 모든 것이 걸리기도 한다. 단어 하나가 모든 것을 표현할 수도 있다. 독자도 시의 문법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시의 문법은 일상의 문법과 다르다. 언어를 달리 배치하고 구성해서 보여준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이성복 시인의 ‘아, 입이 없는 것들’이란 시에서처럼 말하지 못하는 존재를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시인은 고향의 사람들과 풍경, 말하지 못하는 사물과 자연을 대신해서 말한다. 공적인 장에서 채택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박근혜 정부 때 ‘세월호의 아이들을 살려내라’는 목소리가 뉴스에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을 알레고리를 통해 말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신춘문예 당선 뒤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최승자 시인의 시에서 가져온 말이다. 아이들은 온 존재를 걸고 운다. 나도 모든 것을 걸고 절실하게 이야기하겠다는 뜻이다. 시가 수수께끼여서는 안 된다. 숨기려 하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
요즘 드물게 정통적이고 고전적인 시인이란 평가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 시의 요건이나 형식이 조금 보수적이다. 시가 쉬워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한 편의 시에서 이해할 수 있는 한 구절은 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시의 핵심에 다가가게 할 한 문장이 있어야 한다. 시를 읽을 때 시적 발견이 있어야 한다. 내겐 정통적이고 고전적인 스타일의 시가 맞는다.”
‘시를 쓰면서 가장 압력을 느끼는 대상’을 김수영과 이성복으로 꼽았다.
“해방 이후 시인들이 가장 압력을 느끼는 대상은 김수영이다. 김수영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을 뚫고 나가려 했고,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변신하려 했다.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게 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성복은 ‘한국에 시인은 김수영밖에 없다’고도 말했다. 두 사람은 내게 가장 중요한 시인이다.”
시인의 대중적 인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창작자에게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여건은 중요하다. 문인은 가난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주장은 막연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창작자에게 가난한 환경을 강요해선 안 된다. 실제 창작에 전념할 수 없는 조건에 처했을 때 느끼는 자괴감을 느껴보지 않은 창작자는 드물다. 그런 조건을 뚫고 나가서 극소수 창작자들이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바탕으로 일정한 물질적 여유를 누린다.”
소셜미디어에서 시가 소비되는데.
“특정 시 구절에 사진과 그림을 곁들여 소비재로 만드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이 대표적이다. 장점은 어떤 시 구절이 한 편의 시나 한 권의 시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독자의 눈과 마음을 움직여서 시로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삼는다. 단점은, 한 편 또는 한 구문을 전달하는 데 치중하기에 한 시인의 시 세계 또는 시집의 전체적인 톤과는 무관하게 소비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시의 전체적인 메시지와 상관없이 개개의 문장을 낭만적이거나 감성적인 차원으로 한정해서 소비한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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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8월5일 서울 광화문에서 인터뷰 사진을 찍을 때 그는 “웃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혹시 세월호 때문이냐”고 묻자 그는 “웃는 모습이 바보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뜻밖이어서 웃었다.
신철규 시인은 원래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소설을 좋아했다. 그래서 한때 소설을 쓰려고도 했다. 그의 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김수영이다. 문학반 선배한테서 동아리 가입 선물로 받은 <김수영 전집1 시>가 평생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처음 시를 읽었을 때, 처음 시를 쓸 때, 세월호에 대해 시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거울이었다. 지금도 시를 쓰면 언제나 김수영에게 비춰본다.
그는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유빙’이라는 시로 등단했다. 2017년 첫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를 발표했고, 2018년 ‘심장보다 높이’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 선정됐다. 2019년엔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로 신동엽문학상을 받았다. 심사위원회는 “신철규의 시집은 동시대 사람들의 깊은 슬픔에 다가갔다”고 평가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이과였고, 대학에서 도시공학과를 잠깐 다니기도 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이과의 매력이라고 했다.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는 문장도 이과적인 사고(‘눈물의 중력’)에서 나왔다. 그는 2020년 2월 논문 ‘김종삼 시의 심미적 인식과 증언의 윤리’를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공부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시를 써서는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집에서만 글을 쓴다. 환경의 변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밤에 혼자 있을 때 글을 쓰는 이유도 누가 옆에 있어서 주의가 흐트러지는 게 싫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그는 글을 쓸 때 노트북(랩톱)을 쓰지 않고 데스크톱만 쓴다고 했다. “노트북으로 쓰면 같은 글을 써도 더 가볍게 느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두 번째 시집은 내년이나 후년 여름쯤 내겠다고 했다. “시집은 아직 요원하다. 더디 쓰는 편인데 작년에 서너 편 썼고 올해도 그만큼밖에 못 썼다. 시가 나를 어둠 속에서 건져낼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둠에 더 깊이 들어가면 시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 다음 시집은 이르면 내년이고, 늦어도 내후년엔 내려고 한다. 여름에 나왔으면 좋겠다. 어울려서 술 마시기 좋은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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