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1이 사랑한 작가 박연준② ‘고요를 길러낸 소란’

등록 2020-08-14 08:41 수정 2020-08-18 00:30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김혜진① “사람이 항상 궁금해요”에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098.html


소설을 쓸 때 쥐고 있는 돌멩이

최근 박연준 시인은 소설도 자신의 작업 목록에 포함했다. <악스트> 2020년 7·8월에서 시작한 <여름과 루비>는 그가 처음 대중에게 선보이는 소설이다. 이전 글쓰기가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길어내는 거였다면, 이번에는 겪지 않은 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허구의 세계’다. 여름이 박연준이 많이 들어간 인물이라면, 루비는 그의 친구 여러 명이 합쳐서 들어갔다.

“기본적으로 저는 시·소설·산문·희곡을 포함하는 문학은 작가의 검열과 퇴고 과정, 상상과 비약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허구’가 들어간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 시와 소설은 둘 다 ‘무대’ 위 이야기라고 전제하고 시작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산문뿐 아니라 시와 소설에도 제 경험이 들어가겠지만, 화자를 통해 자유로이 상상하고, 사건을 극대화하거나 극소화하며 가공하기에 허구가 개입하겠지요. 소설은 허구를 가정하고 쓰는 이야기지만 제가 인식한 세계, 경험, 생각과 상상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자에게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단순하지 않다. 허구 속 인물의 약동에 작가가 끌려가게 되어서다. “사실 저는 플롯이나 사건을 완전히 짜놓고 쓰는 타입이 아니라서 제가 만든 인물들이 끝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결말을 가질지, 어떤 과정을 거칠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저 어떤 사건 혹은 인물 모습을 클로즈업하거나 감추며, 느리게 하거나 빠르게 넘겨 보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는 어떤 ‘이야기’가 남겠지요. 그 남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가보는 여정, 제겐 그 여정이 소설 쓰기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독자에게 소설의 끝에서 쥐여주고 싶은 감정은 있어요. 그걸 돌멩이처럼 쥐고, 쓰고 있답니다. 비밀이라 그걸 말씀드릴 순 없고요.”

소설에서 여름은 루비와 만난다. 둘 다 일곱 살이다. “일곱 살 때 내 이름은 ‘뷰우유릅’이었어요/ 아무도 내 이름을 쉽게 부르지 못하도록 날마다 이름을 바꾸었어요/ 시 같은 게, 넙치 같은 게, 밤마다 내 목을 휘감았고”(‘일곱 살’),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 일곱 살 옥상에서 본 펄럭이는 잠옷만큼은/ 무엇도 더 슬프진 않았”(‘베누스 푸디카’)다. ‘시인이 될 운명’ 또한 사촌언니가 ‘아름다운 틈’을 가르쳐준 날 깨달았다. “일곱 살 때 나는 파블로 네루다보다 더 훌륭한 시인이었다고 장담한다. 그땐 시를 쓰지 않아도 시가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내 기억은 언제나 일곱 살에 오래 머물고, 반짝인다.”(산문 ‘일곱 살의 클레멘타인’) 소설에서 우리는 좀더 그 일곱 살의 비밀에 다가간다.

“어린이는 정말 불가사의하잖아요. 왜 태어나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서, 어른들에게 물을 수도 없고. 요즘 아이들은 민주적으로 키우잖아요. 옛날에는 그냥 물으면 혼나고 어른들 말에 끼어들면 안 되고 시키면 해야 했고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죠. 어릴 때는 더 예민했겠죠. 아무도 몰랐던 것 같아요. 제가 시인이 될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랬다면 조심했으려나. 그때 그 시절이 해결이 안 되었는지, 가끔 일곱 살이 저에게 와요. 그런 것에 불려다니니까 계속 피곤하고, 그래서 한번 써보는 거죠. 저만 어린아이 시절 상처받은 게 아닐 테니까요.”

시란 패자가 다 갖는 게임

시인의 직업은 `‘감정이입’일까. 자동문을 끊임없이 열리게 하는 것은 세상의 슬픔과 약한 것들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물론이고 사물에 감정이입이 굉장히 잘돼요, 지나칠 정도로. 레슬링이나 권투 시합에서 처음에는 한국 팀을 응원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상대 나라 선수가 맞으면 그쪽으로 감정이입이 돼버려요.”

그래서 시들의 동사는 떨어지고, 쏟아지고, 넘어지고, 우리는 ‘실패’하고 계속 지기만 한다. “스무 번도 못 센”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고(‘가라앉은 방’), “그러니 무엇도 낳지 말자 우리,/ 사월에는”(‘자꾸 돌아오는 이별’) 다짐하기도 한다. 투신자살한 17살 소녀를 추모하고(‘혀 위의 죽음’), 구제역으로 희생되는 돼지에게서 속눈썹을 발견하기도(‘하늘에서 돼지들이 떨어지는 저녁’) 한다. 시인은 타고르의 “시란 패자가 다 갖는 게임”이라는 말을 즐겨 한다.

“시는 이긴 자의 언어가 아닌 것 같아요. 시는 이긴 자, 끝내 승리하는 자의 목소리와 제일 반대에 있어요. 시는 진 사람, 지고 있는 사람, 앞으로 질 사람 그런 사람의 목소리. 그래서 뭔가를 찬양해야 하는 사건이 있을 때, 그런 걸 시로 쓰면 잘 쓸 수가 없어요.”

눈물 많고 약한 사람인, 그는 젊은 시절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넣고 싶”(등단작 ‘얼음을 주세요’)다 하고, “리본으로 묶어주세요 꽁지가 빠진 나 같은 건/ 쓰레기통에 넣어주세요”(‘안녕?’)라며 자학했다. 최근에 펴낸 산문집 <모월모일>의 머리말에서 시인은 “나를 좋아하는 데 40년이 걸리다니”라고 말한다. 같이 낸 <소란>의 개정판 글에선 “<소란> 이후 삶에서 좋은 것을 조금씩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 한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해설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으니 그녀는 그녀 자신을 좀더 사랑해도 될 것이다”라고 썼다. 세월이 흘렀노라, 무뎌졌노라 쉽게 얘기할 순 없다. 끊임없이 쓰고 애써서 긍정해왔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도 탓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를 긍정하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성향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라 환경 요인이나, 환영받지 못한다는 감각을 가진 사람들. 사랑은 배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근데 제가 아주 못 받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여러 면에서. 절대적으로 너의 존재가 귀하고 환영받아 마땅하다는, 감각적으로 잘 아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건 극소수랍니다. 나머지 사람은 애써서 긍정할 수밖에 없어요, 건강해지려면. 제가 저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30대 초반부터 많이 했어요. 남은 삶을 잘 살고 싶어서. 특히 여성들에게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온갖 것에 평가받고 남을 배려하라고 길러지고, 존 버거의 책에도 있는데 남자는 자기가 하는 일, 능력, 이런 거로 평가받는다면 여자는 어느 자리에서 걸어오는 순간, 목소리와 옷차림과 얼굴과 모습, 분위기와 동시에 같이 평가받는다는 거예요. 가끔 그래요. ‘작가이고만 싶다. 작가이기 이전에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기가 너무 힘들죠. 갑자기 너무 열변을 토했네요. 화가 나서.”

—————

에필로그

에필로그는 아날로그 이야기를 하련다. 박연준 시인은 스마트폰을 장석주 시인에게 맡기고 인터뷰 자리에는 몸만 왔다. 시인은 스마트폰을 쓰지 않겠다 다짐하고 폴더폰으로 휴대전화를 바꾼 적이 있다. 1년 반을 그렇게 살았다. 1년 반 모호한 숫자인 것은 지도도, 메신저도 없는 폰이 너무 불편해서일 것이다. “돌아오니까 빛의 속도로 돌아오더라고요. 훨씬 더 집착하게 됐어요.” 지금은 시간 설정을 하고 그 사이에 스마트폰을 사용하면 나무가 죽는 앱을 사용하고 있다.

“공책에 펜을 떼지 않고 초고를 쓴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공책을 준비해갔다. 습작 시절의 공책들을 간직하냐고 물었더니, 등단작 있는 공책 빼고는 버렸다고 했다. “실비아 플래스 사례를 보고는, 제가 죽으면 누군가 제 집에 와서 발견해 발간하면 어떡해, 그래서 다 버렸어요.” 시 초고는 공책에, 산문은 컴퓨터로 쓰지만 가끔 산문이 잘 안 풀릴 때는 공책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공책에 쓰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이상하게 똑같이 언어를 뱉어내는데, 침묵 안에서 이뤄지는 소통이라서 그런가.”

몇 년째 발레를 하는 박연준 시인은 곧은 자세로 서서 사진을 찍었다. ‘물랭루즈’에서 춤을 출 듯한 주황색 원피스는 공들여 골랐음이 분명했다.

사실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 집 고양이가 입원한 날이어서다. 낮에 토하는데 괜찮으려니 하다, 늘어진 고양이를 둘러업고 새벽 2시 응급실로 향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아침에 파주까지 차를 끌고 갔다. 몽롱한 정신을 헤집으며 눈을 부릅뜨고 인터뷰가 진행됐다. 원시적인 피곤함이었다. 넥칼라를 했던 고양이는 그루밍을 못해 ‘찌’자도 모독일 텐데, 찌·릉·내가 났다. 퇴원한 고양이는 물수건으로 닦아내는데도 가만히 몸을 맡겼다. 털을 닦다가 찌릉내 나는 고양이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에필로그는 몸 이야기다. 기진맥진했기 때문에 수사적인 이야기에는 끌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인의 이야기는 몸을 저릿하게 했다. 원시인이 되는 것이 시인을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박연준 제공

박연준 제공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