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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박연준① “시 쓰기는 눈을 감아야 하는 키스 같은 것”

등록 2020-08-14 17:34 수정 2020-08-18 09:30
김진수 기자

김진수 기자

많은 이가 어떤 문장과 함께 아픈 시절을 견딘다. 너무 강렬해서 뱉어내지 못한 말들을 책의 문장이 대신 해준다. “내게는 사랑이란 첫 독서가 당신이란 책이었고 행복했고 열렬했어요. 어느 페이지는 다 외워버렸고, 어느 페이지는 찢어 없앴고, 어느 페이지는 슬퍼서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쨌든 즐거웠습니다.”(<소란> 중) 그런 책은 한 페이지마다 줄을 그어서 전심전력으로 무거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아 얼굴을 내밀어보렴 수면 위로 수면 위로 네가 떠오른다면 나는 가끔 눕고 싶은 등대가 된다”(시 ‘서랍’, <베누스 푸디카> 중) 누군가는 그런 날카로운 문장을 손글씨로 써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소란>)

햇빛 찬란했던 시절의 아버지

박연준(40) 시인의 책은 자주 아픈 시절 옆에 있다. 책은 속도가 느려서 한동안 침대 옆에, 가방 안에 놓였을 테고 책장이 너덜너덜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면 당신의 한 시절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지도 모른다. 시인이 무릎이 꺾인 채 아픈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맑은 얼굴의 박연준 시인을 7월20일 비가 내리는 경기도 파주 한 카페에서 만났다.

두 번째 시집 제목인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는 ‘뱀이 된 아버지’에 나온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외설적인 장면의 앞뒤는 이렇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밤무대에서 연주하고 현충일 빼고는 매일 출근하던 아버지는 “내가 스물한 살 이후로, 그러니까 아버지가 심각한 정신적 병(알코올중독과 우울증)에 걸린 이후로”(<소란>, ‘일곱 살 클레멘타인’) 서로 악쓰고 저주를 퍼붓는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자국이 생긴 채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손자국을 오래 견디다가/ 가까스로 원상태로 돌아온다/ 휴, 이제 살았다 난 괜찮아/ 아버지는 내 구두 속에다 대고 속삭”(수화)이고 “잠자는 숲 속의 아빠 (…) 오래 체념해온 듯/ 후무사가 먹고 싶다 말하곤 다시 눈을 감”(‘후무사’)는 아빠를, 죽지 않는 아빠를 계속 죽였다. “이미 죽은 당신이 자꾸 죽을까봐 겁내는/ 나는, 이마에 못이 박힌 스물다섯”(‘스물다섯’)을 지나 “여긴 사건현장이에요!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세요! 무덤을,/ 여러 개 준비해주세요// (…) 당신이 낳은 건 아버지가 아니라 한덩이, 어둠이었어요/ 눈먼 아버지는 눈이 먼 채로/ 혼자 걸어야 해요/ 나는 팔이 없고/ 이제 곧, 모든 게, 끝날 테니까. 안녕/ 안녕/ 실명(失明)한 생아”(‘안티고네의 잠’) 하던 스물여섯 살(“스물여섯 개의 초를 꽂기 전에 내 입술이 문드러질 거예요”, 앞의 시)까지 햇빛 찬란한 시절 병과 죽음이 곁에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원한 내 편’”이던 사람, “나를 질투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었기에 더욱 힘들었다(<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중).

이 시절 박연준 시인을 구원해준 것이 시였다. “삶은 퍽퍽하고 힘든데, 그때 해결책은 없는데, 돌파구 같은 게 시였다.” 시는 약효가 좋았다. “시를 쓰고 나면 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때 자다가도 뭐가 떠올라서 공책을 옆에 두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를 쓰던 거 고쳐야지 하고 두근거리며 잠들었다.” 그렇게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살 두세 달마다 한 권씩 두꺼운 공책을 채워나갔다. “너무 재밌었다.”

문창과 학우들은 모두 소설로 데뷔하는 거려니 생각했다는데, 시의 카타르시스에 맛들이면서 시를 써젖혔고 그렇게 모인 시를 열한 편(기준은 다섯 편이라고 한다) 투고한 것이 덜컥 당선됐다(2004년 중앙신인문학상 ‘얼음을 주세요’). 벼랑 끝으로 자신을 몰아세우고 스산한 웃음을 짓는 시는 기진맥진했다. 2011년 가을 “56년 동안 ‘蘭中日記’를 써오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시인의 말) 이제 산문의 시절이 시작됐다.

시란 춤추는 기분

시인은 “세상에 하나뿐인 책을 쓰겠노라 까불”며 에세이 한 권을 통짜로 짰다. 대부분 청탁도 받지 않고 마감도 없이 써내려갔다. <소란>은 아주 천천히 사람들 입길에 올랐다. 출판사 관계자는 1년이 지나도 ‘헌책’이 되지 않았던 책을 소중하게 기억한다. 트위터에 사람들이 문장을 올리고 지역의 작은 책방에서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하나가 되었다. 5년간 3만 부가 팔렸고 재출간(2020년) 뒤 7천 부가 더 나갔다. 시인은 한밤중 김민정 시인의 감상 문자를 받았고 각 출판사에서 일을 함께하자는 제안도 쏟아졌다. 시로 문단에 데뷔하고 산문으로 자신을 알린 시인은 그 둘의 차이를 잘 아는 사람이다.

같은 풍경인데 시가 되고 산문이 되기도 한다. ‘죽음을 산책시키는 여자’는 김민정 시인이 새벽에 죽은 고양이를 안고 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여성이라는 예술>에서 이 장면이 탄생한 연유를 설명해준다. 밤중 김민정 시인은 차로에서 죽은 고양이를 발견하고 장례를 치러줬다. 후배인 유채빈에게 보내는 편지는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에 나오고, 시(‘그애가 저녁에 하는 행동’)로도 다정하게 적었다. 경험을 선별해 어떤 것은 시가 되고 어떤 것은 산문이 되는 걸까. 어떤 경험은 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공통점은 섞일 수 있다는 것이죠. 둘 다 언어를 사용해서 하는 거니까. 다른 점은, 산문이 마라톤이라면 시는 춤과 같아요. 산문은 한 걸음 한 걸음 다 밟아서 가야 하지만 시는 비약과 상상으로, 어디로든 다른 곳으로 점프해서 갈 수 있어요. 산문은 계속 독자를 생각하는데 시는 읽을 사람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아요. 산문은 읽는 사람이 잘 따라오는지, 잘 받아들이는지를 기준으로 고쳐요. 이해가 안 된다면 잘못 쓴 거예요.”

둘을 놓으면 쉽게 ‘시 예찬’으로 기운다. “시가 이해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잖아요. 시는 이유 없이 단지 존재하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죠. 시를 대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그런 거 아닐까요. 이래서 싫고 이래서 좋고가 아니라. 아, 이거 좋다. 나무 보듯이 그림 보듯이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죠. 이유를 물으면 작아지는 장르죠.”

그는 대중을 위한 시 안내서를 준비 중이다. “거의 반쯤 썼어요. 친한 후배들에게 시 쓸 때 기분이 어떠니, 인터뷰도 좀 해서, 짤막짤막하게 넣을 생각이에요.”

아, 시는 기분이랑 맞닿아 있는 장르군요. 시 쓸 때 기분이 어떠냐, 라는 건 좋은 질문인가요.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오디션 보러 갔는데, 춤이 어설프고 거친데 약간 선생님이 놀라거든요. 그 에너지 때문에. 나가보라고 하다가 불러세워서 너 춤출 때 기분이 어떠냐 물어봐요. 빌리는 전기가 통하는 것 같다고 말해요. 산문 쓸 때는 노동하는 것 같고 힘든데, 매번은 아니지만 시를 쓸 때는 춤추는 기분이에요. 신나고 즐거워요. 말 그대로의 즐거움이 아니라 감정 상태가 고양돼 있달까.”

춤에선 몸을 이쪽으로 움직여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건데….

“생각하면 늦어요. 생각하면서 춤추면 망하고, 피아니스트도 생각하면서 연주하면 안 되잖아요. 예술이 태어나고 만들어질 때는 생각보다 앞서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시를 퇴고할 때는 오래오래 많이 고치거든요, 생각하면서. 그거는 아름답기 위해서 고치는 거지, 그전에 작품으로서는 서 있는 거죠.”

시를 쓸 때 “펜을 안 뗀다”(팟캐스트 <책읽아웃-김하나의 측면돌파> 인터뷰)고 했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가요.

“무의식을 많이 끌어내려고, 내가 모르는 감정 에너지를 검열하면 얘기가 안 나와요. 사람들이 이걸 볼 생각을 하면. 조금의 틈이 있으면 이성이 지배하려고 하잖아요. 키스할 때도 생각이 개입하잖아요. 그러니까 연인들이 눈을 감는 거 아닐까요.”

*21이 사랑한 작가 박연준② ‘고요를 길러낸 소란’으로 이어집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099.html
*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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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의 시인 공동체

장석주와 김민정 두 시인은 박연준 시인의 연인들이다. 그들은 이웃해서 정답게 살고 있다.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는 박연준 시인, 장석주 시인 부부가 함께 쓴 독서일기다. 책을 펼치면 왼쪽이 장석주 시인의 글, 오른쪽이 박시인의 글이다. 3일째의 일기, 박 시인은 존 버거의 죽음을, 장 시인은 송인서적 부도에 대해서 적고 있다. 박 시인은 존 버거의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을, 장 시인은 스티븐 핑커의 과학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쓰고 있다. 둘은 이렇게 많이 다르다.

박연준 시인은 <모월모일> ‘그의 머플러는 여전히 이상하지만’에서 “너는 시가 아니라 소설을 써야 한다”고 설득했던 장석주 강사를 기억해낸다. 글은 “알 수 없는 세월이 흘렀고, 알 수 없는 세월이 도래할 것이다”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결혼식을 대신해 두 시인이 쓴 책이다. 한 달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살며 있었던 일을 반을 나눠 썼다. 이번에는 앞뒤로 나눠서. 이 책은 난다 출판사 대표인 김민정 시인의 기획이다. “김민정 시인이 결혼식을 주최해줬죠. 신랑신부가 남이 주최한 결혼식에 참석했죠.”(박 시인)

박연준 시인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 여성 예술가를 다룬 책 <여성이라는 예술>에서 이사도라 덩컨, 실비아 플래스와 함께 김민정 시인에 대해 썼다.

김민정 시인의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문학과지성사, 2019)에는 워낙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준이의 양파’에는 박준 시인이 트렁크에 싣고 온 양파가 많아서 이웃해 사는 박연준 시인 부부에게 나눠준다. “파주가 너무 좋은 게 파주는 나무들이 짐승처럼 자라요”라고 ‘연준’은 말한다.

장석주 시인의 시집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문학동네, 2019)의 ‘서른 즈음’ 시에는 “서쪽을 편애하는 이가 망원에 산다/ 그가 왜 싸움을 피하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생애의 유적지 한가운데 서서/ 서른 즈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혼자/ 되새겨본다”는 구절이 있다. <소란>의 첫 글 ‘서쪽, 입술’에서 박 시인은 “나는 기울어지는 것들만 골라서 사랑하는 유별난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싸움을 피하는 박 시인과 아직 싸움의 비탈에 선 장 시인이 오래오래 같이 살고 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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