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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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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서인-남인은 왜 휘그-토리가 되지 못했을까

집권하면 상대방 파멸시키려 한 붕당정치
등록 2020-08-01 06:30 수정 2020-08-04 01:07
조선의 의정부는 세 정승 등 최고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합의제 정치 기구였다. 현재 서울 광화문 앞 의정부 터의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박승화 기자

조선의 의정부는 세 정승 등 최고 정치인들이 참여하는 합의제 정치 기구였다. 현재 서울 광화문 앞 의정부 터의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박승화 기자

“사대부의 예의와 왕가의 예의가 다르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1차 기해예송(예법 논쟁) 때 서인과 노론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이 한 말이다. 사실상 “사대부와 왕가가 평등하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송시열이 생각한 조선 사회의 근본이었다. 당시 왕인 현종으로서는 모욕당한 것이었고, 사대부로서는 최고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사대부의 나라’라는 생각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운 정도전에게서 비롯했다.

‘상복’ 논쟁과 ‘국왕 자격’ 논쟁

그러나 같은 사대부라도 서인과 남인은 결이 달랐다. 서인은 ‘신당파’, 남인은 ‘왕당파’에 가까웠다. 이들은 1659년 효종의 죽음 뒤 격렬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인조의 둘째 부인이자 효종의 새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가 쟁점이었다.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은 “효종이 왕이었지만 둘째 아들이므로 대비가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휴와 윤선도 등 남인은 “왕이 되면 정통성을 얻으므로 맏아들로 봐서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막 취임한 현종은 남인을 지지했지만, 이 논쟁의 승자는 서인이었다. “사대부와 왕가가 평등하다”는 서인의 과격한 주장이 관철됐다. 그러나 서인의 승리는 현종의 분노를 불렀다.

15년 뒤 1674년 이번엔 효종의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여전히 살아 있던 자의대비의 상복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벌어졌다. 2차 갑인예송이었다. 서인이 지배한 예조에선 처음에 1년을 말했다가 9개월로 고쳤다. 1차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을 왕이 아닌 둘째 아들로 본 결정이었다.

이번엔 현종도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 결정을 한 예조의 판서부터 정랑까지 관리들을 모두 잡아들여 9개월로 바꾼 이유를 밝히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현종도 1년으로 되돌리라고 명령하진 못했다. 적법한 절차를 거친 결정은 왕도 쉽게 뒤집을 수 없었다.

반전의 계기는 경상도의 남인 유생 도신징이 제공했다. 도신징은 <경국대전>에서 아들상 때는 어머니의 상복을 1년으로 같게 하고 며느리상 때는 어머니의 상복을 첫째는 1년, 둘째는 9개월로 다르게 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엔 둘째 아들이라도 맏아들 대신 왕위를 이었으면 맏아들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남인의 주장은 현종의 마음에 들었다. 현종은 도신징의 주장을 근거로 당상관(차관보) 이상 관리를 모아 이틀 동안 네 번 회의를 열었다. 1년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경국대전>을 고치려고도 했다. 그러나 당상관 이상을 장악한 서인들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자 현종은 극단적 방법을 썼다. 왕의 직권을 행사해 1년으로 바꿔버렸다. 이에 서인 대신들이 반발하자, 그들을 자르고 그 자리를 남인으로 채웠다.

몇 년 뒤인 1678~81년, 영국에서도 왕의 권한을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다. 찰스 2세가 동생 제임스를 왕위 계승자로 결정했는데, 의회의 신하들이 반발했다. 제임스와 부인 메리가 모두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의회는 가톨릭 신자가 왕과 공직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심사법과 왕위 배척법을 제출했고, 찰스 2세는 의회 해산으로 맞섰다.

1896년 대한제국은 우리 역사상 첫 의회를 중추부에 설치했다. 중추부는 현재의 정부서울청사 남쪽에 있었다. 박승화 기자

1896년 대한제국은 우리 역사상 첫 의회를 중추부에 설치했다. 중추부는 현재의 정부서울청사 남쪽에 있었다. 박승화 기자


정당정치로 진화한 영국

이 과정에서 의회는 두 세력으로 분열했다. 하나는 ‘신당파’로 왕위 계승자라도 영국 성공회와 의회주의를 절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휘그’라고 불렀다. 다른 하나는 ‘왕당파’로 가톨릭 신자라도 왕위에 오를 수 있고, 의회가 이를 간섭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을 ‘토리’라고 불렀다. 신당파인 휘그는 서인과 닮았고, 왕당파인 토리는 남인과 닮았다. 이 싸움에선 휘그가 이겨 제임스 2세는 국외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 뒤 조선과 영국의 당파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조선에선 서인과 남인이 서로 죽이고 죽는 극단적 싸움을 벌인 끝에 서인만 살아남았다. 이 과정에서 서인의 지도자 송시열과 남인의 지도자 윤휴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서인 중에도 노론, 노론 중에도 서울의 몇 집안이 권력을 오로지했다.

반면 영국에선 토리가 왕보다 성공회와 의회를 앞세우는 휘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의회민주주의가 더 발전했다. 선거권이 귀족과 젠트리에서 노동자와 여성으로 확대됐고, 가톨릭 신자의 공직 진출도 허용됐다. 1834년 토리는 보수당으로, 1859년 휘그는 자유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근대 정당을 선언한 셈이다. 두 당은 노동당 집권으로 자유당이 몰락한 1929년까지 200년 넘게 영국의 양대 정당으로 경쟁했다.

왜 조선의 당파는 근대 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영국의 당파는 근대 정당으로 발전했을까?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당시 영국엔 의회가 있었고, 선거권이 점차 확대되면서 대중을 설득하려는 정당정치가 발전했다. 조선에도 붕당정치가 있었지만, 영국 같은 민주주의 토대가 없었고 식민지가 되면서 더는 발전할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동아시아철학 연구자인 이상수 박사는 “조선 사대부의 붕당(친구당)은 구양수의 군자-소인론에 따라 우리 붕당은 정통이고, 다른 붕당은 이단이라고 봤다. 상대에 대한 관용이 부족해서 집권하면 상대를 파멸시키려고 했다. 그런 극단적 태도가 선거로 정권을 잡거나 내놓는 근대 정당이 될 수 없었던 원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조선의 붕당은 근대 정당으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조선에도 그런 타협 정치의 싹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합의 정치 기관이던 의정부(정치를 의논하는 부처)였다. 서울 광화문 앞에 있던 의정부 터가 최근 발굴돼 국가 사적으로 지정될 예정이다. 또 1896년 대한제국은 무보직 당상관 기관이던 중추부(중심 부처)를 역사상 첫 의회로 만들었다. 중추부는 의정부 터의 맞은편인 정부서울청사 남쪽 일부에 있었다.

타협 정치의 상징 ‘의정부’ 터 최근 발굴

1919년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첫 의회를 만들었다. 조선 의정부의 이름을 딴 임시 ‘의정원’이었다. 불행히도 임시정부와 의정원은 해방 뒤 미군정에 의해 그 합법성이 부정됐다. 대신 1946년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가 대한민국 국회의 기초가 됐다. 과도입법위는 현재의 서울 중구 예장동 일제 통감부 청사에 있었다. 현재 남산예술센터 자리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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