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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세탁기 있어봤자

김덕호의 <세탁기의 배신>, ‘패러독스’ 해결되지 않는 가사노동 추적
등록 2020-05-15 14:26 수정 2020-05-15 14:26

인류의 삶을 바꿔놓은 최고 발명품은 뭘까? 문자, 바퀴, 백신, 인터넷…. 세계의 많은 사람이 세탁기를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는다. 수백, 수천 년 동안 가사노동을 혼자 떠맡다시피 해온 여성을 고된 빨래에서 해방시켜준 혁명적 발명품이라는 것. 20세기 들어 전기밥솥,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등 다양한 주방·생활가전 제품도 일상화했다. 그럼 여성의 삶도 혁명적으로 나아졌을까?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의 <세탁기의 배신>(뿌리와이파리 펴냄)은 이런 통념에 본질적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가사기술은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했음에도 20세기 대다수 주부들은 가사노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으며 “(오히려) 가사기술은 기존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확대하는 데 공헌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왜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는가’(부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미국과 유럽 등 이른바 선진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화가 가져온 사회변화를 실증적으로 들여다본다.

1920년대 후반 미국의 웬만한 중산층 가정에선 주요 가전제품이 널리 보급됐다. 당시 미국 농업부가 여러 주에서 진행한 조사 결과를 보면, 도시 주부의 가사노동 시간이 농촌 주부보다 더 길었다. 1968년 시애틀 주부들에게 한 조사에서도 세탁기, 진공청소기, 건조기, 음식찌꺼기 분쇄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을 사용하는데도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거나 되레 늘었다. 이른바 ‘코완의 역설’이다.

지은이는 먼저 18~19세기 산업화 이후 가정이 일터와 분리되고 노동의 성별 분업 체계가 확립된 것에 주목한다. “남성은 일터에서 노동력을 제공해 임금을 받아오고, 여성은 가정의 수호자로서 가사노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념이 정당화”됐다는 것이다. 가사노동은 ‘자발적 무보수’가 당연시되는 ‘그림자노동’으로 은폐됐다. 이런 현실은 ‘전기 하인’이 ‘가내 하인’을 몰아내고 주부를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란 낙관적 신념에 가렸다. 1920년대에 급증한 상업광고의 주요 목표 대상이 전업주부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주부는 남편이 벌어온 소득을 쓰는 ‘현대의 소비자’로 묘사됐다.

‘전기 하인’을 쓰고도 가사노동 시간이 줄지 않은 더 직접적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생활수준 향상’으로 설명된다. 위생과 청결이 문명화 기준으로 인식되면서, 가족의 질병 예방과 건강 유지의 우선적 책임도 주부들 몫이 됐다는 것. 예컨대 “일주일에 한 번 하던 빨래는 매일의 세탁물로 바뀌”었고, 식단에도 영양가를 생각해야 했다. 가사노동의 강도는 줄었지만 빈도는 외려 더 늘어난 셈이다. 지은이는 “현재의 소비자본주의 체제에선 많은 가전제품이 나와도, 가사노동이 구조적으로 그림자노동을 벗어날 수 없고 대부분 주부만의 몫이라면 ‘코완의 패러독스’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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