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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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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24시

등록 2019-11-22 11:05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1년에 두 번 명절 거사를 치르기 위해 끌려간 목욕탕. 힘센 젊은 엄마는 어린아이 사지를 쭉쭉 잡아당기며 때를 미는데, 나는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났다. 몸을 뒤로 빼면 엄마는 어깻죽지를 짝 소리 나게 때렸다. 무섭기만 하던 목욕탕이 견딜 만해진 건 할머니 덕분이다.

할머니의 작은 몸을 미는 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할머니는 뜨거운 탕에 바싹 마른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그러면 잠시 뒤 얼굴 전체에 몽글몽글 물방울이 피어났다. 그건 할머니 몸이 알맞게 불었다는 신호. 할머니 등을 밀고 있으면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셨는데, 어떤 분은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그땐 그런 게 있었다.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으면 앞에 선 이의 가방도 들어주었다. 지금은 누구도 서로 등을 밀자 하지 않고, 아무리 무거운 걸 들고 있어도 들어주겠다거나 맡기겠다고 안 하지만. 누구를 돕기는커녕 누구도 만나지 않고도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사람과 접촉 없는 ‘언택트 마케팅’

이른 아침, 차를 몰고 집을 나서는데 주유 경고등이 깜박였다. 평소 다니는 셀프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다시 타려는데 차체에 먼지가 수북했다. 세차장에 차를 밀어넣고 컨트롤박스에 동전을 넣었다. 고압수와 거품을 번갈아 가며 차를 닦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건 찬데, 내 몸이 으스스했다. 드라이브스루(승차 구매)가 있는 카페를 통과하기 전, 차 안에서 사이렌오더(원격 주문·결제)로 주문하니 통로를 빠져나올 때 점원이 차창 안으로 커피를 건네준다. 오전에는 문자와 전자우편으로 기념식 책자와 배너 시안을 업체 디자이너와 몇 차례 주고받았고 보고서를 썼다. 점심쯤 외근에 나섰다. 업무를 다 마치고 나니 조금 출출했다. 국숫집엔 점원은 보이지 않고 매장 입구엔 키오스크(무인정보단말)가 설치돼 있었다. 나는 화면이 시키는 대로 주문했고,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벽에 걸린 모니터에 뜬 번호를 보고 음식을 가져왔다. 우동은 국물이 짰다. 물은 셀프입니다, 라고 붙은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마시고 퇴식구에 식기를 반납했다. 외근을 마치고 퇴근 시간 지나 집에 돌아왔다. 차 뒷자리에 놓아둔 커다란 이불을 챙겨 24시간 셀프빨래방으로 향했다. 세탁기에 역시 동전을 넣고 설명서가 시키는 대로 조작하니 1시간 조금 넘어 건조까지 끝났다. 오늘 나는 아무와도 악수하지 않았고, 이렇다 할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다만 무인 시스템 앞에 섰고 셀프로 서비스했다. 유통가에서는 이를 두고 사람과 어떤 접촉도 없다는 뜻의 언택트(Untact) 마케팅이라 부른다고.

차가워서 아득해질 때 최명희의 한 문단을 떠올린다. “맨 처음 서울로 전근이 되어 이 거대한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 무엇보다 그녀를 질리고 당황하게 했던 것은, ‘말’이었다. 단정하게 깎은 무색투명의 서울말, 그 매끄럽고 날렵한 말씨의 유리면에, 어디 깃들어 스며들 만한 모세혈관 한 오라기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언어 언저리에서, 그녀는 잘못 날아든 나비처럼 서성거리며 맴돌았다.” 무색투명한 도시의 말이 횡행하던 곳에서 우리는 이제 어떤 말도 흐르지 않는 조용한 나날로 이동하고 있는 걸까.

말 붙이는 거라곤 AI

얼마 전 시골에 홀로 사는 할머니를 인공지능(AI)인 효돌이가 돌보는 사진을 신문에서 보았다. 효돌이는 할머니 일어나세요, 할머니 약 드실 시간이에요, 할머니 식사하셔야죠, 같은 저장된 말을 한다. 두 사람(?)을 함께 사진 찍어 제목을 붙인다면 ‘오래된 미래’쯤 될까. 가까운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 역시 할머니가 될 땐, 더 ‘사람스러워진’ 효돌이가 나를 돌보게 될까. 모를 일이다.

김민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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