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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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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김지영을 보다

육아는 누구에게나 처음
등록 2019-11-20 00:55 수정 2020-05-02 19:29
제16회 홍콩아시안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 영화 <82년생 김지영>.

제16회 홍콩아시안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 영화 <82년생 김지영>.

“시위를 취재하지 않으면 큰 위험은 없을 거예요. 강화된 경찰의 검문·검색을 대비해 형광색 프레스 조끼와 안전모는 꼭 챙겨가세요.” 한 달여 전 홍콩 시위를 먼저 취재한 이재호 기자의 조언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11월1일 나흘 동안 홍콩을 다녀왔다. 10월29일부터 11월17일까지 홍콩 전역 6개 극장에서 열린 제16회 홍콩아시안영화제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영화제를 취재하러 가면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건, 홍콩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10월31일 핼러윈데이에 홍콩 경찰이 최루탄, 실탄, 후추 스프레이를 앞세워 예고도 없이 란콰이펑을 급습해 축제를 즐기기 위해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쓴 시민들과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기 때문이다. 진압 과정에서 한 미국 여성 관광객이 체포됐고, 내·외신 기자들도 경찰에게 공격당했다. 서울 이태원쯤 되는 란콰이펑도 얼마든지 경찰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시위가 22주차에 접어든 탓인지 홍콩은 생각보다 많이 지쳐 보였다.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홍콩아시안영화제는 홍콩을 포함해 아시아 각국에서 온 젊고 재능 있는 영화인들을 끌어모아 등대인 양 구룡반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5년 전 우산혁명과 최근 홍콩 시위에서 영향받은 듯한 홍콩영화 위주로 매일 서너 편씩 챙겨보았다(영화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이번주치 을 챙겨봐달라). 개봉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보지 못한 한국 영화 도 마침 취재 일정이 맞아 감상할 수 있었다. 많은 홍콩 사람이 이미 원작 소설을 읽은 까닭에 영화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 덕분인지 영화제 첫 상영이 매진을 기록했다. 디디 우 홍콩아시안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은 여성들의 현실과 고민을 다룬 이야기라 홍콩에서도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이 많고,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며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니까”라고 말했다.

뒤늦게 본 영화는 주인공 김지영(정유미)의 삶만큼이나 그의 남편 대현(공유)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서 대현은 가사도 육아도 거의 하지 않는다. 늦은 밤 아이를 재우고 빨래를 개는 아픈 지영을 걱정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아내에게 “누가 그런 거 하라고 했어?”라고 말하는 모습은 답답했다. 또, 침대 위에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아이 하나 더 낳아달라”고 징징거리다가 지영에게서 “낳을 자신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나 배고파, 밥 차려줘”라고 소리치는 장면은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고 할까, 철이 없다고 할까. 그럼에도 ‘자상해 보이는 대현만 한 남편이 어디에 있기에 지영이가 우울해하냐’라는 관객 반응을 보면, 육아와 가사에 관해서 사람들이 유독 틀린 질문을 많이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가 가사와 육아를 도와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가사와 육아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함께 하는 일이다. 영화제 상영작 를 남편과 함께 공동 연출한 케이트 레일리 감독은 “한국에 비하면 홍콩을 포함한 중화권은 남자와 여자가 공평하게 가사와 육아를 분담한다. 어떨 때는 남자가 더 많이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가사와 육아가 대현에게 처음이듯 지영에게도 처음이다.

홍콩=글·사진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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