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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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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대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걸까

설리 죽음을 접한 뒤 서로의 안부를 물은 네 명의 2030 여성,

한국에서 이삼십대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다
등록 2019-11-04 11:28 수정 2020-05-03 04:29
설리 인스타그램 사진 갈무리

설리 인스타그램 사진 갈무리

10월14일 가수 설리가 세상을 떠났다. 부고 소식을 들은 날, 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텔레비전 등 그의 소식을 접하는 통로를 차단하고 침대에 웅크려 일찍 잠들었다.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설리 죽음이 내게는 메시지 같았다. ‘한국에서 네가 너답게 살려고 하면 결국 죽게 돼.’ 설리가 왜 죽음을 택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죄책감이 들었다. 좀더 드러내놓고 지지할걸, 좀더 응원할걸. 그건 또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너무 깊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안부를 묻고 서로를 돌보았다.

설리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친구가 많았다. 설리는 ‘노브라 셀카’를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여자는 여자가 돕는다”(Girls supporting girls)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고, 낙태죄 폐지에 함께 기뻐했다. 사회가 젊은 여성에게 기대하는 규정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설리의 행보를 보다보면 어쩌면 나도, 좀더 자유롭고 용감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땅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리에 관해 쓰는 건 옳은 일일까? 그토록 대중에게 시달리다 떠난 사람을 또 불러내도 될까? 같은 이유로 집담회에 참석해줄 수 있냐고 연락한 여자들 모두 망설였다. 한편으로 설리가 또래 여자들에게 준 집단 경험이 있었다. 그것은 꼭 말할 필요가 있었다. 설리에 관해 감히 말할 수는 없어도, ‘설리와 나의 관계’는 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어떤 규정에도 자신을 가두지 않았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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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7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근처에서 이삼십대 여성 네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김소염(활동명)은 출판사에서 편집자인 30대 여성이고, 이은진은 젠더 법학을 공부하는 20대 대학원생이다. 신화용(이하 화용)은 20대 그래픽디자이너이자 페미니스트 활동가다. 나, 하미나는 20대고 여성과 우울증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이자 작가다. 또 이날 모인 여성들은 모두 우울장애나 불안장애 등을 겪고 약물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

화용 ‘도대체 설리가 왜 죽었을까?’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어떤 면에서 되게 공감한 거잖아요. 그래서 또래의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소염 설리뿐 아니라 이삼십대 여성이 우울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갈 때 모멸감을 느껴요. 사회가 나를 애정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당연히 우울할 수밖에 없어요. 이삼십대 여성이 원하는 걸 성취했을 때 ‘거봐, 난 이 정도야’ ‘나 잘나가’ 이렇게 할 수 없는 분위기예요. 본인조차 ‘운이 좋아서’ ‘누가 도와줘서’ 일하는 것 같고. 특히 가까운 가족이나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겪는 문제로 우울한 것을 저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약과 상담의 도움을 적절하게 받으며 살아가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누군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중략) 저도 같은 여성으로서 우울증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설리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애도는 하되 거리두기를 하는 방법이 필요해 보여요.

화용 (페미니스트 진영에서 설리를) 잔다르크로 만드는 것 같아요.

김소염 (설리 죽음을) ‘여혐’이라는 이미 있는 단어로 이해하려는 것 같은데, 애도하되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저는 설리를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거든요. 방송에서 여자 연예인이 “저, 지금 노브라인데요” 이야기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잖아요.

화용 제가 독일 베를린에 있을 때 브래지어를 한 번도 안 했어요. 근데 한국에서는 집 밖에 나갈 때 미치도록 신경이 쓰였어요. (노브라로) 옷을 입다가 다시 옷을 벗고 브래지어를 착용했어요. 설리는 연예인이라 보는 눈이 많은데, 진짜 진짜 큰 용기가 필요했다는 걸 알았어요.

김소염 설리가 볼 수 있는 장소에다 “네 생각이 좋다, 너를 지지한다”고 쓰지 못한 게 아쉬워요. 설리가 외모에 관해 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외모 지적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 칭찬도 평가다. 외모에 대한 언급은 자기가 발견한 것만 이야기해야 한다” 했던 거요. “오늘은 흰 재킷을 입었네요” 이 정도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겉모습에 할 수 있는 적절한 수위의 발언이라고도 하고. 설리가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화용 저는 오히려 설리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 못했어요.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는 입에 담으면 안 되는 존재잖아요. 제가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설리에게 “너를 너무 존중하고, 너 진짜 멋있어”라고 했을 때 설리가 사람들에게 두 배로 욕먹을까봐요. 그래서 ‘페미니스트로서 너를 정말 지지한다’는 말을 속으로만 한 거죠. 주머니에 손 넣고 엄지손가락 치켜세우는 것처럼.

이은진 어떤 분은 설리 죽음이 페미니스트 동료 하나를 잃은 것 같다고 하셨어요. 활동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식인들은 설리를 자신과 동등한 페미니스트 주체로 보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설리가 최자와 연애할 때나 사진작가 로타와의 작업으로 ‘롤리타 논란’이 일어났을 때, 설리에게 ‘네가 여성 인권을 후퇴시키는 거야’ 식의 악성 댓글을 달았던 일부 ‘넷페미’가 아니더라도, 지식인에게 설리는 ‘대상’이었어요. 특히 ‘롤리타 논란’ 때는 설리가 이를 의식해 인스타그램에 “로리타 로리타 적당히 해라. 알맞은 데 가서 욕하렴” 하고 사진을 올린 적이 있죠. 그걸 시점으로 지식인 사이에서 설리는 페미니스트 주체가 아닌 것으로 고정된 것 같아요. 설리는 사과도 해명도 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밝혔어요. ‘어느 편인지 말 안 할래’ 한 거죠.

화용 설리가 무슨 심정으로 그 게시물을 썼을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우리 생각처럼) 당당하게 썼을지 정말 마음이 무너지면서 썼을지….

하미나 그 게시물을 정말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다 복잡하고 다양하잖아요.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 있다고 해도 그거랑 정반대의 행동을 할 수 있고요. 설리는 어린 여자 연예인에게 기대되는 행동 규범을 벗어나면서도 페미니스트가 설리에게 들이미는 규정에도 어긋나니까. 자기 욕망대로 살면서 어떤 규정도 자유롭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죠. 바로 이 점 때문에 항상 자신을 지지해주는, 말하자면 드러내놓고 설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잘 안 보였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더 안타까워요. 저도 조용히 응원하던 사람이었기에 더 죄책감이 들었고요.

10월27일 오후 서울 홍익대 앞 스터디룸에서 (왼쪽부터 시계방향) 하미나·이은진·김소염·신화용씨가 ‘설리와 나’를 주제로 집담회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10월27일 오후 서울 홍익대 앞 스터디룸에서 (왼쪽부터 시계방향) 하미나·이은진·김소염·신화용씨가 ‘설리와 나’를 주제로 집담회를 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font size="4"><font color="#008ABD">어려 보이는, 긴 머리의 예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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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염 요즘 영화 얘기가 많잖아요. 주연배우 정유미씨가 시사회장에 ‘숏컷’을 하고 나타났어요. 지난번 여성영화제에서도 배우 김민정씨가 숏컷으로 나타나서 홍보대사를 했고요. 페미니스트면 일단 머리가 짧아야 해, 화장 안 하고. 이런 고정관념이 있어요. 설리처럼 페미닌한(여성스러운) 부분이 많은 사람이 저런 발언을 하는 게 귀에 안 들어오는 거죠. ‘우리가 세운 룰 앞에서 네가 여러 허들을 더 넘고 급진적인 것을 더 보여주면 우리가 페미니스트로 인정하겠어’, 이런 거죠.

집담회 참석하기 전에 설리 인스타그램에 무슨 댓글이 달렸는지 찾아봤어요. 거의 80%는 성희롱이고 20%는 “너 나대지 마” 식의 나쁜 말들이었어요. 설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활동했잖아요. 얼굴도 동안이고. 어려 보이는 한국 여성이 받는 사회적 무시가 알게 모르게 있다고 봐요.

하미나 젊은 여성에게 사회가 기대하는 태도가 있어요.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여자. 식당 가면 제일 먼저 휴지 깔고 수저 놓는 식으로요. 그것과 어긋나는 자기 모습이 있더라도 드러내기 어렵죠. 가령 회사에 다니는 제 친구는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거나 여성혐오 발언에 반감을 표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괴롭힘을 받기도 했어요.

김소염 한때 설리의 인스타그램 논란이 기사로 뜨면 ‘아, 그냥 SNS를 하지 말지’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게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어요. 우리 세대는 누구나 SNS를 하잖아요. 그걸 통해 나는 누구고 어떤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기록을 남기는 게 우리 세대인데. 설리의 행동을 보면서 ‘그럴 수도 있지’ ‘저러고 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드러내놓고 인정해준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랑스럽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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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나 설리 죽음이 어떤 메시지처럼 느껴졌어요. ‘한국에서 네가 너로 살려고 하면 결국 죽게 된다’는 메시지요. 설리는 되게 용기 있는 사람처럼 보였잖아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 정말 연약하기도 한 것 같아요. 내가 취약한 그 순간을 모면하면 자살을 막을 수도 있는데, 아주 작은 도움이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나 안타깝죠.

이은진 ‘지금 여기에서 나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생존할 수 없는 전략이다.’ 설리 자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제가 받은 느낌이에요. 아이유도 페미니스트에게서 논란이 되고 자꾸 평가받는 대상이죠. 아이유를 좋아했던 이유는 아이유가 대중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과 자기 자신을 모두 잘 알면서도 영리하게 그걸 오가며 농담으로, 때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이 제게 용기가 됐기 때문이에요. 그게 정답인 거 알죠, 사회의 기준과 진짜 나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이.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알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줄타기하다보면 어느 순간 공허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렇게 허무해지는 순간에 설리 생각이 많이 났던 것 같아요. 좀더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봐봐, 나 사랑스럽지?” 하고 말하는 용기. 그런 종류의 용기는 항상 취약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맨살을 드러내는 거니까요.

화용 독일에서 지내다 얼마 전 한국에 돌아왔는데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너무 불안했어요. 한국에서 여성운동을 하며 광장에서 겪은 공포가 너무나 커졌고 남자들을 보는 게 무서워서요. 내게 직접 폭력을 가했던 사람과 비슷한 얼굴들이 공항에서부터 보이니까 너무 불안했어요. 설리 부고도 너처럼 살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친구랑 함께 병원에 가서 불안장애 약을 처방받았어요.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건 딱히 엄청 강해서가 아니라, 위기 순간에 손을 잡아준 사람이 있었고, 문이 하나 닫혔을 때 열린 문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더 설리가 안타까워요.

하미나 온라인 공격을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이 쉽게 “그거 고소하면 되지” 이야기하면 저는 되게 화났어요. 그 PDF 파일 하나하나 따는 게 얼마나 사람을(힘들게 하는데)… (저에 대한 욕을) 다 읽게 되잖아요. 저한테는 타격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있는 거예요.

지난 6월 싱글앨범 《고블린》 발매를 앞두고 연 특별 무대에서의 설리.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 6월 싱글앨범 《고블린》 발매를 앞두고 연 특별 무대에서의 설리. SM엔터테인먼트 제공

<font size="4"><font color="#008ABD">설리에게 주어졌어야 할 온당한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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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진 추모 방식을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 사회가 ‘충분한 애도’에 정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설리가 속했던 에프엑스(fx)의 다른 멤버, 설리 지인들의 인스타그램에 몰려가 ‘왜 추모글을 올리지 않느냐’고 악플을 달았잖아요. 일단 악플을 단 것 자체도 비판할 일이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무엇인지’에 감정이입을 못하는 사회구나 생각했어요.

설리 자살 이후 지금까지 나온 글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저도 한 명의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이 설리 죽음에 대해 글 쓰는 방식은 실망스러웠어요. 이들은 설리가 죽은 이유를 ‘악플’이라고만 하면 그 내용이 성희롱이었다거나, 같은 행동도 여자 연예인이라서 악플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지워진다고 비판했죠. 동의해요. 그런데 저는 여성혐오 때문에 설리가 죽었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뭔가를 지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설리는 일부 페미니스트한테도 비난받았는데, 그것을 언급하지 않고 ‘페미니스트 고 최진리님을 기억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건 페미니즘이 설리 죽음에 끼친 맥락은 지워버리는 거잖아요. 추모는 언제나 그 죽음에 내 탓은 없는지 성찰하는 데서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화용 설리 죽음마저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느낌이 들어요. ‘어떡해, 우울증 때문에 죽었대!’ 이 정도를 추모로 생각하는 모습이 너무도 얄팍해요. 설리 자살이 속보로 떴던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요.

김소염 설리가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는 것도 사생활 차원에서 밝히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도 4~5년 우울증 치료를 받았어요. 회사 같은 공적 관계에 놓인 사람들에게 결코 제 우울증 치료를 밝히지 않았어요. 우울증 환자가 너무 많은데, 우울증 끝이 자살인 것처럼 기사화돼요. 우울증 끝은 자살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위태로워 보이는 친구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요. 설리가 언젠가 방송에서 자기가 힘들었을 때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설리에게도 나이 차를 조금 두고서 그를 인정해주는 선배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이삼십대가 사회에 표출하는 분노를 미숙한 것으로 보지 않고 이해하려는 선배요. 나중에 우리가 ‘미래의 설리’와 만난다면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커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어쨌든 살아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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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용 설리가 행복했을 거라고 혼자 생각한 적이 있어요. 설리가 혼자 쿠바에 갔을 때일 거예요. 인스타그램에 게시글이 올라왔고, ‘아, 그래도 설리는 자기가 원할 때 저렇게 가기 힘든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해사하게 잘 지낼 수 있구나’ 속으로 혼자 부러워했어요. 이제는 ‘아, 너도 힘들었겠구나’ 생각해봐야… 죄책감이 들어요. 다른 사람의 자살 동기가 무엇인지, 그때 마음이 어땠을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거예요. 어쨌든 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이유로 고통받았을 사람, 그가 보여준 행보가 ‘엄청난 용기였다’는 걸 말할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나대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걸까’라는 좌절이 아니라, ‘어쨌든 살아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설리 죽음이 그런 계기가 되는 게 아니라, 이 일을 통해 우리가 고민하고 나눈 질문들을 통해서요. 설리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묻기보다는 여기서 절망을 느낀 여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하미나 르포작가 지원 공모제 당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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