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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치킨의 꿈

등록 2019-10-04 12:17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작은 언덕 아래쪽엔 8월 땡볕을 피할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그늘 한 점 없었다. 가까운 곳에 인가 한 채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역에서도 제법 떨어진 바스토베. 이역만리 지명도 낯선 땅까지 우리는 왜 힘든 발걸음을 옮겨놓았을까? 뗏장도 제대로 덮지 못한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양의 치킨집

그러니까 이곳은 연해주 지역에 살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고려인과 그 후손이 묻힌 곳이다. 좁은 화물열차 칸에 실려 오는 동안 많은 고려인이 식량 부족과 건강 쇠약으로 숨졌다. 살아남은 이는 이곳에 땅을 파고 들어앉아 거적때기로 찬 바람을 가리며 꼬박 한겨울을 나야 했다. 그 고난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무덤 앞에 잠시 고개 숙여 묵념 올리는 것 외에 우리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동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으로 들어가는 동안 어느새 고려인 무덤에 대한 상념에서 벗어나 기막힌 풍광에 넋을 잃곤 했다. 끝없는 벌판을 달리면서 멀리 늘어선 천산산맥 줄기와 설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히 가슴에 새길 만했다. 샤린협곡이며 천산산맥 입구에 자리잡은 알틴아라샨협곡, 제주도의 서너 배 크기를 지닌 이식쿨호수를 차례로 찾아다니며 자연의 위대함에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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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장소와 장면이 많았지만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들른 두 곳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여행의 안내를 맡아준 분은 키르기스스탄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세종학당의 학당장님이었다. 학당장님 안내로 세종학당을 방문했을 때 키르기스스탄 학생들이 보여준 부채춤과 케이팝 춤 공연은 매우 훌륭했다.

대통령궁 앞 골목에 있는 코코치킨에서는 세종학당 출신 종업원을 만났다. 코코치킨은 이번 여행길에서 정 감독이라 불리던 분이 운영하는 곳이다. 정 감독은 영화와 다큐멘터리 감독 겸 제작자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 북한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보급하고 싶어 평양에서 치킨집 두 군데를 운영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알게 된 인맥을 활용한 덕분이라고 하는데, 경영 여건이 안 좋아 문 닫을 수밖에 없었단다.

세종학당 출신 종업원 아이자마흐의 한국어 실력은 뛰어났다. 수줍게 웃던 그녀 곁에는 치킨집 매니저를 맡은 키르기스스탄 청년이 서 있었다. 둘은 곧 결혼할 사이라 했다. 한국에서 먹던 것과 똑같은 맛을 지닌 치킨을 먹으며 두 청춘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전해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에서도 코코치킨을 운영하는 정 감독은 평양에 다시 코코치킨을 열고 싶은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두 개의 코리아 ‘코코’

여기서 잠깐 코코치킨 상호에 대한 이야기를 짚고 가자. 닭울음 소리인 ‘꼬꼬’를 알파벳 ‘KOKO’로 표기한 줄 알았는데, 남과 북 두 개의 코리아를 생각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했다. 정 감독은 남북 평화가 정착되면 평양을 연고지로 삼는 야구단 코코치킨스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까지 풀어놓았다. 정 감독이 아이자마흐 부부에게 키르기스스탄 코코치킨을 양도하고, 대신 평양에 다시 코코치킨을 여는 날이 오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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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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