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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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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등록 2019-08-23 10:56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유년에 제가 먹은 밥은 모두 할머니가 지어주셨습니다. 1919년생 할머니는 가끔 일본말로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일본말을 잘하시느냐고 물으면 일본놈들이 일본말을 안 쓰면 죽이겠다고 하니, 살려고 배웠다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일본놈들은 찢어 죽여도 분이 안 풀릴 텐데 자기도 모르게 가끔 일본말이 튀어나온다며, 그럴 땐 입안이 쓰다 하셨습니다. 학교에서는 36년간의 일본 식민지배와 식민사관에 대해 배웠습니다. 일본이 밉고 싫었습니다.

증오는 대물림되는 걸까

1998년,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됐습니다. 국민 정서상 불가하다고 말이 많았지만, 당시 김대중 정부는 ‘두려움 없이 임하되 점진적으로’ 받아들이자 했습니다. 걱정이 머쓱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빠르게 일본 문화에 매료돼갔습니다. 저 역시 문화충격을 받았습니다. 특정 분야만 살아남는 한국과 달리 일본 음반 시장은 저변이 넓어 다양한 장르가 안정적으로 소비되는지라 들을 게 참 많았습니다. 만화책, 애니메이션, ‘다양성 영화’(저예산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고요. 첫 일본 여행도 잊지 못합니다. 도시는 아름답고 정갈한데, 만나는 이들은 사려 깊고 친절했습니다. 문화가 전도사라더니 과연 그랬습니다. 제 안에 켜켜이 쌓였던 미운 ‘국가’의 악마적인 이미지가 일본 ‘국민’과 문화 덕분에 차츰 엷어졌습니다. 반한 감정이 있던 일본인들도 한국에 살며 부모 세대가 심어준 한국 이미지가 점차 사라졌다고 하니, 드러내지 못한 두 마음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옅은 감상도 잠시, 일본이 독도를 괴롭힐 때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려 할 때마다, 식민지배는 한국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정치인들의 망언이 들려올 때마다, 다시금 적의가 되살아났습니다. 아베 신조는 지지하지 않아도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한 아베 내각의 결정에 일본 국민의 3분의 2 정도가 지지한다 하니, 아무래도 일본은 안되는 나라인가, 절망감이 깊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며칠 전 조간신문 1면에 실린 초등 2학년생의 사진이 옳고, 마땅하다 여겨야 하는데 서글픈 마음이 먼저 듭니다. 사진 속 아이가 두 손으로 들어올린 팻말에는 “아베 총리 나빠! 일본 나빠! 일본은 사죄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이는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어른이라면 비장한 표정이었을 저 문구에 나라 간 복잡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아이는 하품이 납니다.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매스컴도, 일본이 나쁘다 하니 아이도 일본이 나빠집니다. 아니 싫어집니다. 이렇게 다시 출구 없는 증오가 대물림되는 걸까요.

일국의 지도자가 전쟁범죄를 부정하며 경제규제로 보복하는데 당신들은 침묵하거나 동의합니다. 이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종주의를 조장하고 반이민 정책을 강화할수록 증오범죄가 늘어나는 양상과 닮았습니다. 동조 세력은 서슴없이 ‘미국을 다시 하얗게’ 만들자고 하니까요. 비약이 심하다고요? 소극적 동의와 적극적 지지라는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 악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국민으로 산다는 건 고통스러우리만치 그 나라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이를 두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했겠지요. 아베는 지금 경제 수치 정도로는 환원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시민’들이여

일본 시민사회가 아베 총리 관저 앞과 도쿄 시내 등지에서 아베 정권의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한국과 연대를 바라는 시위를 이어나간다고 합니다. 이제라도 다행입니다. 저는 아베에게 제동을 거는 이들은 한국보다는 일본 ‘시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안에서 아베 규탄 시위가 더 확장되길 바랍니다.

김민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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