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꼭 10년 전 에 쓴 칼럼의 후속편이다. 당시에도 ‘서정민의 뮤직박스’ 꼭지가 있었는데, 3주에 한 번꼴인 지금과 달리 매주 나가는 대신 분량이 4분의 1도 채 안 되는 미니 칼럼이었다. 2009년 새해를 열어젖힌 제743호에 쓴 글의 제목은 이랬다. ‘10년 뒤엔 그럴 줄 알았지’. 분량을 날로 먹으려 든다고 욕먹을 걸 각오하면서도 그 글을 그대로 옮기겠다. 믿거나 말거나, 이건 오로지 독자들이 인터넷으로 과거 글을 뒤져보는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함이다.
10년 뒤엔 그럴 줄 알았지“그때는 그럴 줄 알았지 2009년이 되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너에게 말을 할 수 있을 거라/ 차가운 겨울의 교실에 말이 없던 우리/ 아무 말 할 수 없을 만큼 두근대던 마음/ 우리가 모든 게 이뤄질 거라 믿었던 그날은/ 어느새 손에 닿을 만큼이나 다가왔는데/ 그렇게 바랐던 그때 그 마음을 너는 기억할까/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던 2009년의 시간들”
새해가 밝은 요즘 ‘브로콜리 너마저’의 이란 노래를 즐겨 듣는다. 모든 게 이뤄질 것만 같았던 2009년이 왔건만, 난 노련한 민완기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행복하다. 브로콜리 너마저 1집 《보편적인 노래》의 예쁜 노래들을 들으며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그 어떤 민완기자도 누리기 힘든 호사니까.
당시 난 브로콜리 너마저 1집에 푹 빠져 있었다. 그건 임신한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산부인과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카스테레오에선 브로콜리 너마저 시디가 돌아갔고, 아내는 솟아오른 배를 두드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해 3월 딸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카시트에 누이고 산부인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어김없이 브로콜리 너마저 노래가 흘렀다. 태교음악으로 익숙한 선율 덕이었을까. 눈감고 자는 아이 얼굴이 왠지 평안해 보였다. 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10년 뒤인 2019년이 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2019년이 됐다. 팔뚝보다 작던 신생아는 이제 키 140㎝가 훌쩍 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이른 사춘기가 왔는지 요즘은 엄마 아빠보다 친구랑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하고, 집에 있을 때도 헤드폰을 끼고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 지내곤 한다. 딸아이는 걸그룹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트와이스 노래를 줄줄 꿴다. 언젠가 노래방에 같이 갔을 땐 트와이스 단독 콘서트를 보는 줄 알았다. 초딩이 랩까지 줄줄 읊는 걸 보며 트와이스 대세론을 절감했다.
얼마 전 브로콜리 너마저가 3집 《속물들》을 발매했다. 2집 《졸업》(2010) 이후 무려 9년 만의 정규 앨범이다. 반가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새 앨범 발매 기념 공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여느 때처럼 혼자 가려다 문득 딸아이와 함께 가고 싶어졌다. 10년 전 산부인과에서 집으로 오는 차에서 들었던 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태교음악 들으며 잠든 아이“혜원아, 아빠랑 같이 공연 갈래?” “무슨 공연?” “브로콜리 너마저.” “누군지 잘 모르겠는데.” “너 배속에 있을 때 많이 듣던 음악이거든. 아, 네가 즐겨 보는 방송 에 나오는 아저씨도 나와.” “그래?” “공연 같이 가면 전에 갖고 싶다고 한 그 장난감 사줄게.” “좋아.” 거래가 성사됐다.
5월19일, 딸과 함께 서울 이화여대 삼성홀로 가는 차 안에서 브로콜리 너마저 3집을 틀었다. “그래 우리는 속물들/ 어쩔 수 없는 겁쟁이들/ 언제나 도망치고 있지만/ 꽤 비싼 연극은 언제나 빈 자리가 없고/ 어쩔 수 없는 일도 너무 많다네” 타이틀곡 을 들려주며 물었다. “노래 어때?” “좋아.” “진짜 좋아?” “응.” 그냥 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잠재돼 있던 태교음악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했다.
공연장 근처 이탈리아 식당에서 리소토를 먹고, 3집 앨범 표지를 커다랗게 키운 포토월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공연장에 들어갔다. 공연 초반 을 연주하자 딸아이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아까 들은 노래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의 집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1시간이 넘어가자 “언제 끝나?” 하고 계속 묻더니 어느 순간 눈을 스르르 감고 잠들어버렸다. 어깨에 기대 잠든 아이가 깰까봐 나는 박수도 치지 못했다. 아이는 앙코르를 할 때에야 깼다.
공연장을 나왔다. 공연장 앞에선 3집 앨범 표지 사진을 찍으려고 만든 동전 ‘브로코인’(브로콜리 너마저+코인)을 팔고 있었다. “아빠, 저거 사줘.” 1만원을 내니 브로코인 하나와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줬다. ‘9900원짜리 동전, 으음….’ 한정판이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혜원아, 비싼 동전이니 잃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무대 뒤 대기실로 가서 밴드 멤버들과 오랜만에 인사했다. 딸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배 속 아기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태교음악의 주인공과 사진 찍는 날이 오다니. 덤덤한 아이 대신 내가 더 감격했다.
‘2019년의 우리들’이 봉인된 브로코인내색은 안 했지만 딸아이도 꽤나 좋았던 모양이다. 다음날 미술학원 선생님께 브로콜리 너마저 멤버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드리며 자랑했다고 한다. 브로코인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10년이 또 흘러 2029년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나는 환갑을 바라볼 테고, 딸은 성년이 되어 있겠지? 브로콜리 너마저가 그때도 노래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딸과 공연장에 같이 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브로코인의 값어치가 팍팍 올랐으면 좋겠다. 속물 같다고? 사실 브로코인의 가치는 이미 따질 수 없을 만큼 올랐다. 거기엔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2019년의 우리들’이 봉인돼 있기 때문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정우성 “아버지로서 책임 다할 것” 청룡영화상 시상식서 밝혀
“화내서 미안” 명태균에 1시간 사과 ‘윤석열 음성’…검찰이 찾을까 [The 5]
검찰·대통령실·감사원 특활비 다 깎았다…민주, 예결위서 강행
[단독] 친한 “한동훈, ‘공천개입 수사’ 김 여사까지 갈 수 있다 해”…친윤에 엄포
‘TV 수신료 통합징수법’ 국회 소위 통과에…KBS 직능단체 “환영”
어도어와 계약 해지한 뉴진스, 왜 소송은 안 한다 했을까
한동훈 ‘도로교통법 위반’ 신고…“불법정차 뒤 국힘 점퍼 입어”
롯데호텔에서 밤에 페인트칠 하던 노동자 추락 사망
박단 전공의 위원장, 재차 “의대 모집 중지를…여론 조금씩 바뀌어”
동덕여대, ‘본관 점거 학생’ 고발…재물손괴·업무방해 등 6개 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