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가 죄라면 국가가 범인이다.”
지난 3월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온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외쳤다. 온라인에서는 임신 중단 경험을 말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1953년에 제정된 낙태죄는 낙태를 선택한 여성들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그들의 자기결정권을 무참히 짓밟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태죄가 만들어진 지 66년 만에 낙태 처벌법이 개정된다.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국가와의 오랜 싸움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다. 이런 날에 나는 여성이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노예 계급이 되었다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을 권한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계급·인종차별 투쟁에서 빠진 젠더</font></font>
파이어스톤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급진적 페미니즘을 이끈 인물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2의 물결’은 임금 격차, 취업, 보육 시스템 등 제도적 차원의 평등을 이야기한 계열부터 국가와 가부장제가 함께 여성을 착취하고 있다는 계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파이어스톤은 좀더 급진적이고 근본적인(radical) 여성운동을 주장하면서, 교육·계급·인종·신분 등을 타파하고 사회체제 전반에 좌파 혁명이 필요하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과 흑인 민권운동 등 좌파 세력이 진보와 민주의 가치를 주장하던 1960년대 미국에서, 젠더야말로 온갖 차별의 근원이라고 문제제기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계급투쟁, 인종차별 철폐 등의 구호에서 젠더가 빠져 있다는 것을 비판했다. 미국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한 정치적 감수성을 드러내던 좌파 남성 지식인들이 동료 여성에게는 발언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많은 여성을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
파이어스톤은 에서 좌파가 믿고 따라왔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빌려와 이론적 대결을 시도한다. 그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종족을 유지하게 해주는 노예 계급”으로 만들었으며, 여성과 아동은 가부장의 통제 대상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파이어스톤은 이를 ‘성적 계급’(sex class)이라고 한다.
그는 남녀 간의 자연적 차이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를 만들었고, 최초의 노동 분업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임신·출산·육아를 여성의 영역으로 확정하는 성별 분업이 문화적으로 스며들어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라는 심리적 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통파 유대교 집안에서 가부장인 아버지와 싸우며 성장한 파이어스톤은 남성 어른 중심의 전통적 가족 구조야말로 여성 억압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더불어 임신과 출산을 비롯한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차별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그는 이렇게 외친다.
“페미니스트 혁명의 최종 목적은 (중략) 남성 특권의 철폐뿐만 아니라 성 구분 그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 존재 사이에 생식기의 차이는 더 이상 문화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양성 모두를 위한 단성에 의한 종족의 생식은 인공 생식으로 대치될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아빠도 육아휴직’만으론 안 된다</font></font>
그는 ‘양육의 사회화’를 이야기한다. “여성을 생식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양육의 역할을 여성뿐 아니라 남성, 즉 사회 전체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이는 “여성과 아이들에게 경제적 독립에 기초한 정치적 자율성을 주며” “여성과 아이들을 사회에 전면적으로 통합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파이어스톤이 말하는 양육의 사회화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는 공동양육이나 육아휴직의 문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자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고, 남자아이들은 총 놀이를 하는 식의 성별 구분에 반대했던 내 친구는 비폭력 발도르프식 공동육아를 주도했다. 하지만 공동양육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다수의 엄마였고, 엄마들 사이에서는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졌다.
“남자아이니까 조금 뛸 수도 있다”는 말, 우리 사회에서는 무척 당연하게 통용되는 이 말에 반기를 들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친구는 마을공동체를 통해 아이들을 함께 기르려고 시도했던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구청에 육아 단체를 등록하는 것은 남성들이라며 한탄했다. 집을 만드는 것은 여성이, 집에 문패를 다는 것은 남성인 형국이었다.
파이어스톤이 말하는 가족제도의 해체나 양육의 사회화는 성별에 따라 다른 사회적 규칙을 없애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니 단순히 ‘아빠도 아이를 돌본다’ 혹은 ‘아빠도 육아휴직을 한다’는 방식의 사고로는 도달할 수가 없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육아휴직을 했던 한 지인의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는 공동육아에 참여했다. 그는 1년 내내 그 모임의 유일한 남성 회원으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애쓴다면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도 곧잘 양보받지만, 여자인 친구가 아이를 데리고 나갈 때는 아무도 짐 한번 들어준 적이 없는 동네였다는 데 말이다. 가족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점에서 파이어스톤이 1960년대에 꿈꿨던 비전은, 2019년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정치적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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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경제적 토대인 가족을 해체하는 그의 사상은 혁명적이었던 만큼,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페미니스트 독자들조차 파이어스톤의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전 팔루디는 파이어스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 ‘혁명가의 죽음’(Death of a Revolutionary)에서 “파이어스톤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조직에서 축출당했으며, 조현병으로 수십 년간 고생한 끝에 사망했다.
쓸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는 다른 여성들의 삶을 바꿨다. 은 계급투쟁으로 일원화된 진보 진영의 세계관을 해체했다. 여성은 억압받는 계급이라는 그의 주장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부르주아들의 이익에 따른 판단이었다는 볼멘소리나 여성은 ‘취집’(취직+시집 합성어)이나 하면 된다는 비아냥이 당연한 것처럼 존재하는 한국에서 여전히 의미 있다.
국가는 인구 증가의 시대에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라며 산아제한정책을 펼쳤고, 저출산 시대에는 고학력 여성들에게 ‘하향 결혼’을 권유했다. 여성의 재생산권은 그들의 권리가 아니었다. 이에 반격하여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여성들이 거리에 쏟아져나온 날, 우리는 파이어스톤이 상상한 세계에 한발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십시오”</font></font>
잡지 의 창립자인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자서전 에서 임신중단 시술을 해준 의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런던의 의사인 존 샤프 박사는 1957년, 인도로 가는 길에 낙태를 의뢰하러 온 스물두 살의 미국 여성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다. (중략) ‘두 가지를 약속해줘야 합니다. 첫째, 누구한테도 내 이름을 말하지 마십시오. 둘째, 살면서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십시오.’ (중략) 저는 살면서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책을 선생님께 바칩니다.”
이 책에서 의사가 당부한 말과, 파이어스톤이 을 통해 이야기하려 했던 것과, 지금의 한국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통해 바라는 것은 이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font size="2">*연재를 시작하며여성이 성별화되지 않는 여자대학에서 성장한 탓인지, 자연스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남성성을 연구하게 되었다. ‘1950년대 한국소설의 남성 젠더 수행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등의 공저, 등의 역서가 있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만오교양대학 조교수다. ‘페미니즘 읽는 시간’에서는 페미니스트 클래식으로 알려진 책들을 2019년 한국의 시점에서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font>허윤 문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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