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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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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인생의 견습생

‘천천히 가는 삶’을 꿈꾸는 쑤저우의 만수팡
등록 2019-04-26 11:29 수정 2020-05-03 04:29
마음의 병을 앓은 이들이 차린 서점 만수팡

마음의 병을 앓은 이들이 차린 서점 만수팡

옌즈(‘제비’라는 뜻)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었다. 10년 전쯤 산시성 핑야오 고성의 한 식당에서 만난 소녀다. 열일곱 살 옌즈는 그 식당의 어린 종업원이었다. “어서 오세요. 핑야오 고성에는 처음 오신 건가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제비처럼 날랜 동작으로 다가와서 메뉴판을 건넨 옌즈의 입에서 튀어나온 언어는 뜻밖에도 영어였다. 그것도 제법 유창한. 핑야오 고성 같은 시골 식당에서 그렇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종업원이 있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옌즈는 영어만 잘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도 있는, 그야말로 제비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옌즈가 손님을 상대로 영어를 배우고 연습하는 이유는 멀리 ‘날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미래를 허락해달라’

엄마와 단둘이 사는 옌즈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핑야오 고성의 성문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옌즈를 붙들고 놔주질 않기 때문이다. 엄마는 옌즈에게 성문 바깥의 세상은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라고 늘 주입했다. 하지만 옌즈는 성문 밖과 안이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식당에서 만나는 손님과 외지 여행객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다. 그들로부터 들은 성문 밖 세상은 그야말로 ‘왓 어 원더풀 월드’(What a wonderful world)였다. 옌즈는 항상 하늘을 보며 성 안의 하늘과 성 밖의 하늘이 어떻게 다를지 상상했다.

모모는 호리호리한 체형의 스물다섯 살 귀여운 쑤저우 토박이 아가씨다. 모모를 보는 순간 핑야오 고성에서 만난 옌즈가 생각났다. 옌즈와 모모는 여러모로 닮은꼴이었다. 쾌활한 성격도 그렇지만, 둘 다 손님에게 이 얘기 저 얘기 캐물으며 ‘다른 세상’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모모 역시 나고 자란 쑤저우 구시가지 성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천당’으로 이름난 쑤저우에 살지만 모모는 더 넓은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과 한국으로 유학 간 친구들이 전해주는 다른 세상 이야기는 모모의 ‘탈출’ 호기심을 한층 더 자극했다. 하지만 모모는 호기심과 상상만 가득할 뿐 옌즈처럼 적극적으로 ‘날아갈’ 준비는 하지 않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상상해요. 쑤저우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하는. 근데 전 이 담장 밖을 벗어날 용기가 안 나요. 엄마, 아빠, 친구 등 친근한 사람들 곁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전 세상의 모든 여행자가 부러워요.”

모모는 쑤저우 구시가지 중심지에 있는 서점의 직원이다. 그곳에는 관첸제라는 번화가가 있다. 쑤저우 최대 관광 중심지로 전통 먹거리와 공예품 가게, 식당이 몰려 있다. 1년 내내 관광객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다. 이 왁자지껄한 골목 한 귀퉁이에 모모가 일하는 서점이 있다. 상업적 관광지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서점이지만, 서점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진 서점이다.

만수팡(慢书房). 이름처럼 ‘느리고 천천히 가는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모여, 2012년 11월11일 문을 연 인문사회과학 중심의 책을 파는 작은 독립서점이다. ‘양마오’와 ‘루롱’이라는 예명을 가진 주인장 부부에게는 웨이라이(未来)라는 예쁜 딸이 있다. 딸 이름은 중국의 유명 시인인 쉬즈모가 린후이인(중국의 유명 건축가이자 시인)을 연모하다가 ‘나에게 미래를 허락해달라’며 쓴 구애 시에서 영감받아 지었다고 한다. 젊은 주인 부부는 딸 이름 웨이라이를 부를 때마다 자신들이 꿈꾸는 미래를 상상하며 더 열심히 분투할 것을 다짐한다.

만수팡의 북홈인 만수서

만수팡의 북홈인 만수서

속도전식 발전에 마음에 구멍 난 이들

“왜 서점을 차리게 되었냐고요? 사람들에게 좋은 책을 많이 읽게 하고 싶다는 등 무슨 거대한 사명감으로 차린 것은 절대 아니에요.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이 서점을 함께 차린 이들 몇몇이 살아가는 중에 마음에 문제가 생겼어요. 이런저런 인생의 원치 않는 쓴맛을 보면서 마음이 고장 난 거죠. 저와 아내는 결혼하고 둘의 공통분모인 쑤저우에 정착해 각자 광고회사와 출판사 등에서 일하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늘 고향을 그리워하고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 따분한 직장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어요. 그러다 문득 작은 서점을 함께 차려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신기하게도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냥 가진 돈 다 털어 뚝딱 서점을 차리게 됐습니다. 서점을 차리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이고, 살아가면서 수많은 힘든 일을 당해도, 심지어 하루에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을지라도 최소한 이곳은 한때 마음이 고장 났던 우리에게는 마음이 쉴 수 있는 좋은 안식처이자 일터가 될 수 있다고요. 고속철처럼 자꾸만 빠르게 달려가는 중국의 속도전식 발전 시대를 지나오면서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구멍이 나버린 우리는 이제 조금 더 느리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딸아이 웨이라이가 살아갈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어요?”

이들은 구시가지에 또 다른 서점을 열었다. 관첸제 길 건너 20여 분 정도 더 걸어 들어가면 옛 거리의 정취가 물씬 밴, 그야말로 쑤저우의 알짜배기 ‘올드타운’이 나온다. ‘동양의 베니스’라고도 이르는 쑤저우 구시가지는 긴 수로를 따라 전통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쑤저우 토박이들의 삶이 물처럼 굽이굽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 서점 겸 숙박을 겸하는 ‘북홈’(Book Home)을 함께 열었다. 북홈은 중국어로 수서(书舍)라고 한다. 말 그대로 책이 있는 숙소, 책과 함께 머무르는 숙소다.

쑤저우의 전통 가옥 내부를 개조해서 객실 네 개짜리 민박집으로 만들었고, 그곳에는 작은 서점과 카페가 같이 있다. 북홈을 연 것은 장기적인 서점 경영을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수익이 나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행히 만수서(慢书舍)는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성수기에는 방을 잡기 힘든 인기 민박집으로 떠올랐다. 서점 경영에서 생긴 적자도 대부분 이 북홈에서 메워진다.

만수서에서 하룻밤 이상 자본 손님들은 대부분 ‘입에 거품을 물고’ 스스로 홍보요원이 된다. 일본을 여행할 때 정갈한 가정식 민박집에 감동했던 주인 부부가 최대한 일본 가정에 가깝게 공들여 인테리어를 했고, 모든 비품을 일회용이 아닌 최고급 친환경 제품으로 갖추었다. 객잔 내에는 손톱깎이에서 바느질 도구까지 손님에게 필요한 물건이 모두 구비돼 있다.

만수팡의 내부 모습

만수팡의 내부 모습

‘비주얼 짱’ 꿈의 조식

나도 원래는 하룻밤 숙식을 예약하고 갔지만, 다음날 이틀 더 묵었을 정도로 편안하고 정갈한 집 같은 곳이었다. 당직 만사부(만수팡 직원을 이르는 말)들이 차려오는 아침밥은 중국 내 서점 마니아들이 ‘비주얼 짱’이라며 꿈의 조식이라 칭찬한다. 그 조식을 먹고 숙소와 바로 붙어 있는 작은 서점에서 만사부들이 정성스레 고른 책들을 뒤적이며 한나절을 보내고 있노라면 ‘천국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불행은 어떻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올 수 있죠? 최소한의 심리적 대비를 할 여유도 주지 않고….” 내가 묵던 날 당직은 서점에서 ‘위화 언니’라고 부르는 만사부였다. 주인 부부와 함께 가진 돈을 다 털어 서점에 투자한 ‘마음이 고장 났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이혼과 함께 삶이 갑자기 무너져내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고.

마흔 넘어 싱글맘이 된 위화 언니는 자칭 타칭 ‘문제아’ 중학생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마음속 태풍이 잦아들 날이 없다고 한다. 아들이 이렇게 ‘문제스러운’ 아이가 된 것이 혹여 자기가 잘못 기른 탓은 아닌지, 이혼가정이라 생긴 문제는 아닌지, 혹시 아들 뇌에 무슨 병이 있는 건 아닌지 별별 자책을 다 한다고 했다. 정상적인(?) 가정, 행복해 보이는 가정, 똑똑하고 발랄해 보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에서 온갖 질투와 알 수 없는 분노가 들끓는다고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살다가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이 마음에 심각한 병이 생긴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위화 언니는 서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여는 저자와의 대화, 독서살롱 등의 행사에서 사진 촬영을 맡고 있다. 또 서점 내 문화상품을 기획하고 직접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차츰 마음의 태풍이 사그라지고 분노도 잦아들었다. 만수팡은 위화 언니에게 삶의 안식처이자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정신요양원이 되었다. 문제아 아들은 여전히 ‘문제스러운’ 행동을 일삼지만 예전보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길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견습생이지 않느냐’는 어느 책 제목을 인용하며, 자신도 그렇고 아들 역시 인생을 처음 살아가는 견습생이기에 언젠가는 스스로 깨우치며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길을 수정하지 않겠느냐고.

동경의 성문 밖, 넘어야 할 인생의 장벽

핑야오 고성에 사는 옌즈가 정말 제비가 되어 훨훨 성문 밖으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다. 쑤저우에 사는 만수팡 직원 모모처럼 그저 날마다 여행객들로부터 ‘다른 세상’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바깥세상을 ‘동경’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옌즈와 모모에게도 언젠가는 날아가고 싶은 성문 바깥의 세상 말고도 자신이 넘어서야 할 인생의 장벽이 생길 것이다. 양마오와 루롱 부부, 위화 언니처럼 어느 날 마음이 고장 나서 인생길을 새롭게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고.

글·사진 쑤저우(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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