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틀리 크루 ≪닥터 필굿≫(1989)
고등학교 시절 나는 ‘메탈키드’였다. 1980년대 중·후반과 1990년대 초반은 음악깨나 듣는다고 어깨에 힘주던 10대들이 헤비메탈 아니면 쳐주지도 않던 시대였다. 나도 그런 치기 어린 10대 중 하나였다. 내가 즐겨 듣던 헤비메탈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메탈리카로 대표되는 육중하고 진지한 스래시메탈, 그리고 그 반대 지점에 놓을 수 있는 엘에이(LA)메탈이다. 사실 엘에이메탈이라는 말은 한국과 일본에서만 쓰인다. 정확히는 글램메탈 또는 헤어메탈이라고 하는 게 옳다.
글램메탈은 화려한 치장과 외모를 내세운 70년대 글램록의 전통을 이어받은 조류다. 외양을 잔뜩 꾸미고 좀더 팝적인 멜로디를 들려주는 메탈이라고 보면 된다. 헤어스프레이로 긴 머리를 잔뜩 세우고 부풀렸다 해서 헤어메탈이라 하기도 했다. 노래 가사도 술, 여자, 마약 등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밴드가 바로 머틀리 크루다. 1981년 데뷔한 뒤 차츰 인기를 얻다가 1989년 발표한 5집 앨범 ≪닥터 필굿≫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이는 당시 국내 라이선스 음반으로도 발매됐는데, 이게 좀 황당한 상황으로 흘렀다. 타이틀곡 이 마약을 은유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돼 삭제된 것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건 수긍할 수 있지만, ≪닥터 필굿≫ 앨범에 이 없다는 사실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럴 때 방법은 두 가지다.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 가서 불법으로 복제한 조악한 음질의 ‘빽판’을 사거나, 아니면 비싼 수입 원판을 사거나. 주머니 사정이 빤한 학생들은 보통 십중팔구 청계천행이다. 그런데 무슨 복이 있었는지 친구가 수입 시디(CD)를 내게 주었다. (아니, 내가 빌린 다음 안 돌려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가 준 거라 믿고 싶다. 고맙다, 친구야.)
은 감동이었다. 이렇게 호쾌하고 짜릿한 엔도르핀 증폭 음악이 또 있을까. 이 곡 하나면 말을 안 한다. 시디 전 곡이 눈물 나게 좋았다. 제목에는 분명 먹는 파이가 들어갔는데 묘하게 섹시한 느낌의 , 운전도 못하면서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 적당한 속도의 곡인데도 그 어느 곡보다 흥겨운 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발라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머틀리 크루는 1981년 니키 식스(베이스), 타미 리(드럼), 믹 마스(기타), 빈스 닐(보컬)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했다. 3집(1985)의 과 4집(1987)의 가 히트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5집 ≪닥터 필굿≫으로 초대박 히트를 친다.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다 2015년 갑자기 “이번 투어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해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내한공연 한 번 안 하고 은퇴라니! 당시 마지막 투어를 보러 일본에 가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2015년 12월31일 투어는 끝났고, 이후엔 정말로 잠잠했다. 그러더니 지난 9월 머틀리 크루 멤버들은 새 노래를 작업하고 있다고 깜짝 발표했다. 언젠가 한국에 올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의 그 시디를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어쩌다 잃어버린 건지, 친구에게 돌려준 건지 기억이 희미하다. 문득 그 노래들이 미치도록 그리워서 몇 년 전 시디를 다시 샀다. 사실 음원 사이트에서 들으면 될 일이지만, 왠지 시디로 듣고 싶었다. 자동차에서 시디를 틀고 를 들으며 질주하노라면, 영화 에 나오는 타임머신 자동차라도 탄 것만 같다. 음악적으로 더 훌륭한 명반이 넘쳐나지만, 나는 죽어도 이 음반만은 늘 차에 놔둘 것 같다. 이건 언제라도 날 뿅 가게 해줄 합법적인 ‘마약’이니까.
2. 머틀리 크루 ≪닥터 필굿≫니키 식스 씨께. 보내주신 데모 테이프 잘 들었습니다.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음악들로 가득하더군요. 앨범 제목부터 아주 좋습니다. 보통 병원에 가면 무섭잖아요. 의사들은 대개 불친절하고, 커다란 주사를 맞을 수도 있고, 행여나 불치병 통보라도 받으면 어쩌죠? 그런데 기분 좋게 만드는 의사라니! 그 병원 매일매일 가고 싶어지는군요. 이거 전국병원협회 홍보가로 밀어도 되겠어요.
그런데 데모 테이프에서 왜 이렇게 술 냄새가 나는 거죠? 냄새만으로 취할 지경이에요. 여기 묻은 하얀 가루는 뭡니까? 킁킁. 무슨 냄새가 이렇죠? 아, 기분이 이상해요. 더는 편지를 쓸 수가 없군요. 앨범 계약을 할지 말지, 그딴 얘기는 개나 줘버리고 일단 &%$#@?@%%#.
3. 에필로그고백한다. 앞에 쓴 글은 내가 존경하는 음악애호가이자 언론인이 최근 낸 책을 오마주한 것이다. 1번 글은 한국방송(KBS) 라디오 피디 정일서의 책 형식을 빌린 것이다. 올드팝 명곡들을 개인적 추억과 음악적 정보와 엮어 맛깔나게 풀어낸 책이다. 2번 글은 문화부 기자 임희윤의 책 형식을 빌린 것이다. 가상의 음반 제작자가 아티스트에게 퇴짜를 놓으며 보내는 편지들을 모은 책인데, 실제 명반을 절묘하게 비튼 블랙유머에 연신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 딴에는 흉내 낸다고 해봤는데, 두 훌륭한 책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잃은 건 자존심이요, 얻은 건 질투심이다. 이래서 나한테는 책 내자는 소리가 안 들리는구나. 에라이, 이나 듣자.
서정민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마이웨이‘ 대독 시정연설 12시간 만에…“7일 대국민담화·기자회견”
엄마, 삭발하고 구치소 간다…“26년 소송에 양육비 270만원뿐”
공멸 위기감 속 윤에 “대국민 사과” 직격탄 쏜 한동훈…특검은 침묵
[속보] 크렘린궁 “푸틴, 최선희 북한 외무상과 만나”
해리스 오차범위 내 ‘우위’…‘신뢰도 1위’ NYT 마지막 조사 결과
“보이저, 일어나!”…동면하던 ‘보이저 1호’ 43년 만에 깨웠다
10도 뚝, 5일 아침 한파주의보 가능성…6일은 일부 지역 영하
정부, 교전 중인 우크라에 무기 지원?…“파병으로 이어질 수밖에”
일본 왕실 보물전…한국엔 없는 ‘신라 가야금’ 천년의 자태
자영업자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유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