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 31번, ‘괴물’ 문제를 풀어봤다. 지문(사진)을 작심하고 읽었다. “를 참고할 때, [A]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는 “구는 무한히 작은 부피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로 시작한다. 부피 요소? “부피 요소는 그것의 부피와 밀도를 곱한 값을 질량으로 갖는 질점으로 볼 수 있다.” 질점? 설명이 있다. “크기가 없고 질량이 모여 있다고 보는 이론상의 물체.” 크기가 없는데 어떻게 부피가 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시간 없다. 넘어가자. 두 번째 문장은 ‘~이루고’로 이어져 ‘이룬다’로 끝난다. 문장을 끊어 쉽게 풀어써주면 안 되는 걸까. 읽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도록 동사를 바꿔주지도 않는다. 이 를 읽고 5개 예시 가운데 틀린 걸 골라야 한다. 1번 예시, “밀도가 균질한 하나의 행성을 구성하는 동심의 구 껍질들~.” 그렇지 않아도 헷갈리는데 겹으로 꾸미는 문장이다.
입시 약자에게 강요되는 일문제를 보면 는 [A]를 이해하기 위한 징검다리여야 할 것 같은데 미로다. [A]에 다가가는 험난한 길이다. 는 ‘참고’ 글로 실패했다. 이 문제를 푸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를 읽지 않고 물리 공식을 떠올리는 거다. ‘언어의 한계’ 체험용이었다면 탁월한 출제였다고 하겠다.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하지 않을까? ‘다음 중 에 대한 이해로 적절한 것은?’ 예시 하나가 추가돼야 하지 않을까. 6번 ‘를 이렇게 쓰면 안 된다.’ 왜 개떡같이 쓴 글이라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이 학생의 책임이고 능력인가? 왜 이해할 책임만 있고, 이해될 책임은 없나? 이해의 책임은 상대적 ‘약자’가 져야 하나?
학생이 하는 교수평가 따위는 없던 1990년대, 한 강의실, 뿔테 안경을 쓴 교수가 들어왔다. 나달나달 노랗게 바랜 노트를 들고 있다. 1시간, 교수는 허공의 한 지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수업 시간 내내 허공의 그 지점이 궁금했다. 이건 무슨 수업일까? 명상의 시간일까? 명상을 했다면 차라리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지 모른다. 그는 우리가 좀더 이해할 수 있도록 단 한 가지 노력도 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해야만 할까? 이해하지 못한 벌은 왜 저질 성적으로 내가 받아야 할까? 졸음 탓에 뚝뚝 떨어지는 고개를 가누며 속을 끓였다.
‘이해’의 책임은 빗물처럼 공평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독일인과 결혼해, 독일에서 살던 시절, 한 부활절, 식구들이 다 모였다. 식탁에 색칠한 달걀이며 초콜릿이 올망졸망 늘어섰다. 따뜻한 가족 모임이다. 잡채를 했는데 면발이 우동이 됐다. 원래 그런 요린 줄 알아서 다행이다. 시동생이 물었다. “이 면은 뭐로 만든 거야?” 나는 민간 외교사절로서 정확한 정보를 주려고 벌떡 일어나 휴대전화를 찾았다. 시동생이 말했다. “독일에서는 식사하다 그렇게 혼자 갑자기 일어나는 거 아니야.” 나는 바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나를 무시해서 한 소리냐면 천만의 말씀이다. 가르쳐주려던 거다. 그런데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옅은 모멸의 색깔을 띠고 있다. 나는 항상 그들의 규칙을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 만큼, 그들이 날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동화’될 책임은 외국인에게 있다.
왜 ‘아기’가 되어야 하는가한국이라면 달랐을까? 며느리는 몇 살을 먹었건 숫제 며늘‘아기’가 된다. “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존중을 표현하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러한 표현을 생략하도록 허용하는 존비법의 체계는 인간관계가 원활하게 굴러가는 데 필요한 감정노동을 ‘아랫사람’의 몫으로 떠넘기는 문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 문화는 아랫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데, 그에게 감정이 있음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의 감정이 그만한 배려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타자화가 유아화-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쓸 수 있다면- 를 동반하는 예는 이 밖에도 많다. 장애인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 생활보호대상자도 곧잘 나이를 무시당하는 아이처럼 취급된다.”(김현경, )
“내년 사업 계획은 언제 짤 거 같아?”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물었다. “그 전해 연말에 짜겠지.” “아니야. 내년 내내 짜.” 목표치 설정은 일종의 줄타기다. 최대한 머리를 굴려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의욕이 충만해 보일 정도로 높게 잡는다. 최고경영자(CEO)의 뜻에 따라 수정하고 나면 벌써 1월, 2월이 간다. 목표치와 실적 사이에 큰 골이 생긴다. 이걸 메우려고 조정하다보면 어느새 CEO의 뜻이 바뀌어 있다. 예전엔 왜 다른 말을 했냐 할 수는 없다. 그 취지를 받잡고 목표치 수정에 수정을 하며 계획을 짜다보면 그 다음해가 와 있다. 왜 1년 내내 계획을 짜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해야 한다. “KPI(핵심평가지표)를 좀더 정교하게 짜봐.” 왜 정교해야 하는지, 여기서 ‘정교’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일단 최선을 다해 상사가 말하는 ‘정교’의 의미를 헤아려본다. 여기저기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정교한’ 가중치를 둔다. 너무나 정교한 나머지 이 KPI가 대체 뭘 재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상사가 보시기에 좋았더라’.
약자가 과격해지는 이유박찬욱 감독의 영화 엔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어떤 이는 심기 불편한 눈빛만 보여도 상대가 그 뜻을 헤아려 움직이지만, ‘약자’가 이해받으려면 서울 광화문 아스팔트 길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 죽고, 75m 굴뚝에서 2년 고공농성을 벌여야 한다. 그렇게 해도 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수능 국어 영역 31번 문제에 어쩌면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 ‘이해의 불평등’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문제였던 거다.
김소민 자유기고가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군인연금 월 500+’ 김용현, 체포 직전 퇴직급여 신청…일반퇴직 표기
판사 출신 변호사 “경호처 직원 무료변론…불법적 지시 거부하길”
경호처 파열음 커진다…“체포영장 막으면 불법” 간부의 ‘항명’
경호차장 “윤 대통령 진솔되시고 진심이시다” 과거 발언 소환
최상목, 고교 무상교육·AI교과서도 줄줄이 거부권 행사할 듯
90세 이순재 KBS 연기대상…“평생 신세 지고 도움 받았다”
영장 재집행 않고 주말 보내는 공수처…‘경호처 무력화’ 어떻게
윤석열 쪽 “14일 헌재 불출석…신변안전·불상사 우려”
윤석열 극우 획책에 ‘백색테러’ 위험…지지자들, 영업 방해·살해 협박
윤석열 쪽 변호인 선임계 제출…공수처 “영장 효력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