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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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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여주마

무대에서 마이크 하나 들고 말로 웃기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록 2018-09-22 17:43 수정 2020-05-03 04:29

“에이에스엠아르(ASMR·조곤조곤 속삭이는 등 마음을 안정시키는 소리) 화법이 있다. 이게 뭔가 하면, 아줌마들이 찜질방에 모여 이야기를 한다. ‘영희네 집 10억이나 올랐대.’ 여기에서 ‘10억 올랐대’ 이 부분만 속삭이며 말한다. 이 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하하.”

9월15일 저녁 8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코미디 헤이븐’. 지난 6월 문을 연 스탠드업 코미디 전용 공연장이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희극배우(코미디언)가 혼자 무대에 올라 관객을 마주하며 입담 하나로 웃기는 코미디 장르 중 하나다. 이날 주말 공연에선 6명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한 명씩 무대에 올라 5∼20분 동안 코미디를 보여줬다.

입담만으로 관객을 들었다 놨다
무대에서 마이크 하나 들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이용주씨. 박승화 기자

무대에서 마이크 하나 들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이용주씨. 박승화 기자

무대에 오른 스탠드업 코미디언 이용주(31)씨가 마이크 하나를 들고 말로 관객 30여 명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이날은 할머니와 고모들의 대화에서 들은 여성의 언어를 웃음 소재로 삼았다. 무뚝뚝하고 거친 남성의 언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대방을 치켜세우며 기분 좋게 하는 말, 공감해주는 말 등 여성의 언어를 남성 관객에게 알려준다.

TV 개그 프로그램에서 본 듯 낯익은 얼굴의 이씨는 SBS 공채 16기 개그맨이다. 5년여간 개그맨 지망생 생활을 하다 2016년 SBS 공채 개그맨이 됐다. 하지만 개그맨이 된 다음 해에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이 폐지됐다. 방송 무대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프로그램이 없어지면서 ‘코미디언은 아티스트가 아닌 방송인이자 방송의 소모품이구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코미디밖에 모르는 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당시 7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러 프랑스 파리에 갔다. 그곳에서 화가로 활동하는 어머니에게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들었다. “어머니가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셔서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로서의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티스트가 되려면 자기만의 시각과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려면 평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주셨다.”

어머니 말을 들은 뒤 고민하던 지난해 8월, 개그맨 유병재씨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영상을 봤다. 그때 유병재씨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표방한 ‘블랙코미디’를 선보이며 특유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언변으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걸 보고 “나만의 관점으로 나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스탠드업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함께할 개그맨들을 모았다. 그들이 바로 정재형(29)씨, 김민수(27)씨, 박철현(26)씨다. 그중 정씨는 개그맨 지망생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정씨 역시 KBS 공채 개그맨이지만 그가 만든 새 코너가 통과되지 않아 무대에 못 서고 있었다. “웃길 수 있는 또 다른 무대로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용주 형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이전부터 스탠드업 코미디를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코미디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도전하고 싶은 장르다.”

“내가 나로서 코미디를 하는 첫 경험”

정씨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첫 무대를 잊을 수 없다. 날짜도 정확히 기억한다. 지난해 11월30일이다. “관객 20여 명 앞에서 30분 동안 스탠드업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최악이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잘 몰랐던 때라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그냥 줄줄줄 말했다. 웃음 포인트를 어디에 둘지도 모르고….”

그동안 에서 콩트 코미디를 해온 그지만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는 신인이었다. “는 콩트 코미디라서 코너에서 맡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그런데 스탠드업에선 내가 나로서 코미디를 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았다.”

무대에 올랐을 때 가장 힘든 것은, 관객을 웃기지 못하고 정적이 흐르는 순간이다. “웃음 포인트라고 생각하던 순간 정적이 흐르면 그걸 어떻게 잘 풀어나가야 하나 고민이 된다. 그걸 풀려고 다른 유머를 하지만 다시 정적이 흐르면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웃음)” 여러 번 무대에 설수록 정적의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여유와 노하우가 생긴단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개론서인 에서도 “스탠드업 코미디를 잘하려면 시간 더하기 고통이 필요하다. 즉, 다양한 관객 앞에서 셀 수 없을 만큼 공연을 하면서 망가지고 실패하며 고통을 겪어야만 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미국 등 서구에선 주류 코미디 장르지만 국내에선 낯설다. 2000년대 초반 KBS 스탠드업 코미디 프로그램 이 방송됐지만 콩트 코미디,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밀려 사라졌다. 그러다 지난해 유병재씨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이 성공함으로써 국내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기성 개그맨 남희석, 박영진, 김영희 등도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로 진출하고 있다. 정씨는 “개인의 목소리나 개성에 귀 기울이는 사회 분위기도 스탠드업 코미디가 주목받는 이유”라고 한다. 콩트 위주의 TV 개그 프로그램을 벗어나 다양한 코미디 장르를 만나고 싶은 젊은층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날 스탠드업 코미디를 본 관객 이보람(26·가명)씨는 남자친구와 연극 관람 대신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택했다. 생애 첫 스탠드업 코미디를 본 날이다. “스탠드업이라는 말만 들었지 본 적은 없어 호기심에 보러 왔다. 오늘 본 공연 중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현대판 노동요나 에이에스엠아르 화법을 이야기한 게 공감이 가고 재미있었다. 코미디언의 표정과 몸짓을 눈앞에서 바로 보니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웃음은 힘이 세다”

정씨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러 오는 관객이 “여성이 80%”라며 “관객들 반응이 가장 좋은 이야기는 연애와 가족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사람들이 평소 말하기 꺼리는 정치적 이슈, 종교, 성에 관한 소재를 건드리며 관객의 웃음을 끌어낸다. 하지만 각 사회에서 허용 가능한 농담 수위에 따라 소재의 제약이 있다. “아직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시작하는 단계라 관객에게 종교 등 민감한 소재보다는 친숙한 소재를 다룬다. 예를 들어 생선 중 복어가 가장 고난도의 요리 재료라고 하면 정치·종교 등 민감한 소재도 그와 같다. 좀더 내공을 쌓은 뒤 복어 요리에 도전하고 싶다. 맛있게 요리하면 사람들이 ‘엄지 척’ 하지만 잘못 요리하면 엄청 센 독으로 다가온다.”

대학 졸업 뒤 바로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선 박철현씨도 웃음의 내공을 차근차근 쌓고 있다. 박씨는 2011년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코넌 오브라이언의 다트머스대학 졸업 축사 영상을 보고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심 갖게 됐다. 젊은 세대에게 따뜻하고 현실적인 위로와 공감을 준 그가 무척 멋있었단다. 박씨는 “웃음은 힘이 세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갖게 한다”며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해 편안한 웃음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펴낸 스탠드업 코미디언 최정윤씨


여성의 삶을 코미디에 담고 싶다


최정윤 제공

최정윤 제공

번역가, 외신기자에서 여성친화형 성인숍 공동 창업자를 거쳐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변신한 최정윤(33·사진)씨. 그는 올해 초 두 달간 미국 뉴욕 최고의 스탠드업 코미디 클럽에서 코미디 코스를 이수하고, 맨해튼 전역의 클럽 오픈 마이크 무대에 섰다. 그 경험을 (왓어북 펴냄)에 담았다.
처음 섰던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는.
지난 2월8일 홍익대 앞 공연장에서 5분 동안 했다. 그때 여성의 오르가슴 등 성을 소재로 이야기했다. 너무 떨렸다. 관객들 눈을 못 쳐다보고 관객들의 머리와 머리 사이를 봤다.

책 에 한국계 미국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마거릿 조의 말을 빌려 스탠드업 코미디는 “내 아픔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썼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두 명이 코미디 배틀을 하면서 자신들이 소아 성추행 피해자임을 이야기하는 영상을 봤다. 처음엔 어떻게 그런 걸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비극적 일을 겪었지만 그걸 이겨내고 진한 농담을 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무대에서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나 역시 성추행 피해자다. 나는 그걸 부끄러워한 적이 없는데 그 이야기를 꺼내면 주변 사람들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그게 싫었다. 내가 성추행 피해 생존자로서 당당하고 독립적인 어른이 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심지어 웃긴 사람이 되어 웃으며 살 수 있는 모습도 말이다.
무대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웃음 터졌을 때다. (웃음)
어릴 때부터 꿈이 코미디언이었나.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불안정한 마음과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방어기제 였던 것 같다. 지금도 친구들과의 단체카톡방에 웃긴 동영상이나 문자를 보내는 이 중 한 명이다.
여러 코미디 장르 중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택한 이유는.
2004년 미국 유학 시절에 스탠드업 코미디를 처음 봤다. 당시 외국 친구를 사귀지 못해 외로웠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증세가 심해졌다. 그때 유튜브로 우연히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봤다. 당당한 태도로 무대에 올라 사람들을 웃기는 게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웃기는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웃음 소재로 다루고 싶은 것이 있나.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여성의 성이나 여성이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롤모델이 있나.
미국 여성 코미디언 앨리 웡이다. 그는 임신 7개월 때도 무대에 올랐다. 여자로서 사는 자신의 경험을 재밌게 풀어냈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 좋다.
앞으로 계획은.
30대 여성인 내 이야기를 코미디 소재로 해서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싶다. 40살쯤 되면 다시 뉴욕으로 가 영어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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