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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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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 결제 소리에 ‘만세’

물건 사러 갈 때마다 카드부터 챙기는 도담이
등록 2018-08-21 18:45 수정 2020-05-03 04:29

도담이는 대중교통만 타면 울었다.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울음소리가 청명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나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까닭에 아내와 나는 목적지에 채 도착하기 전에 내려야 했다. 택시는 더했다. 운전에 방해될까 “거의 다 도착했어. 조금만 참아”라고 말하며 연신 달래야 했다. 매번 택시 기사는 말을 안 했을 뿐 아주 진땀을 뺐을 것이다(죄송합니다). 자가용이 없어 차가 익숙지 않은 까닭에 도담이가 무서웠나 싶었다. 이게 불과 한 달 전까지 겪은 일이다.

‘삑.’ 2주 전 택시를 탔는데 웬걸, 도담이가 울지 않았다. 아내 지갑에서 꺼낸 신용카드를 꼭 쥔 채 입을 꾹 다문 표정이 다소 결연해 보였다. 도담이는 손잡이, 앞좌석 카시트, 창문 등 택시 안 여기저기에 신용카드를 대었다. 마치 아내와 내가 계산하는 동작을 따라 하는 듯했다. 그날 도담이는 카드를 직접 결제 단말기에 댄 뒤 ‘삑’ 소리를 듣고 양손 높이 들어 ‘만세’ 했다. 이후 아이는 재미가 붙었는지 택시·버스·지하철 타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고, 생협·편의점·식당을 갈 때마다 카드부터 챙겼다. 물건을 사려면 돈(카드)을 내야 한다는 경제 원리를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몸으로 익히는 걸 보면서 신기했다.

최근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관심을 가지면서 암호화폐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에 도담이를 데리고 간 적 있다. 카페 하나를 빌려 마련된 이곳에서 소비자와 판매자(창작자)는 암호화폐로 맥주, 초, 드립백커피, 닭강정, 정장, 가죽지갑 등 다양한 상품을 사고팔았다. 나 또한 방향 스프레이 하나와 맥주를 샀는데 도담이가 신용카드 대신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고 물건의 QR 코드를 직접 찍어 결제했다. 방향 스프레이를 살 때 도담이에게 신용카드 대신 휴대전화 카메라를 쥐여주니 신용카드를 다시 달라며 떼를 썼다. 하지만 금세 휴대전화 카메라로도 물건 사는 과정을 지켜보더니 맥주를 살 때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사흘 전(8월14일), 도담이는 어린이집에서 시장놀이를 했다. 학부모가 과일·과자·장난감 등 물건들을 준비하면 아이들이 별 모양 스티커로 갖고 싶은 물건을 사는 놀이였다. 퇴근하고 집에 가니 토끼 인형, 젤리, 모형 망치, 보노보노 신호등, 과자, 가지 등 도담이가 사온 것들이 거실 바닥에 잔뜩 널려 있었다. 무엇으로 샀냐고 물어보니 도담이는 별 스티커를 들어 보였다. 어쩌면 도담이는 신용카드, 휴대전화 카메라(암호화폐), 별 스티커를 물건 사는 데 필요한 도구인 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도로 집어넣었다. 이제 겨우 17개월짜리 아이가 상거래를 알까 싶었기 때문이다. 물은 물잔에 따라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그저 생협에 가면 물건을 고르고 카드를 꺼내 결제 단말기에 찍어야 나갈 수 있다는 과정을 알게 된 게 아닐까.

글·사진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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