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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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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축제의 맛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평화 도시락’

축제장에서 맛본 지역 음식 두고두고 생각나
등록 2018-07-10 17:05 수정 2020-05-03 04:28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에 온 음악인, 평론가들과 술 한잔을 했다. 서정민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에 온 음악인, 평론가들과 술 한잔을 했다. 서정민

숱한 음악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오늘은 무대 분위기나 음악 말고 좀 다른 얘기를 해보려 한다. 바로 음식 얘기다.

축제에 음식이 빠질 리 없다. 결혼식 가면 국수부터 갈비탕, 스테이크, 뷔페까지 다양한 상차림이 펼쳐진다. 하객들은 신랑 신부 얘기보다 음식 얘기를 더 많이 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네 결혼식 때 음식 참 맛있었어” 하는 식이다. 돌잔치나 칠순잔치는 물론이고, 축제는 아니지만 장례식에서조차 “육개장이 먹을 만하네” “편육이 괜찮네” 하는 얘기를 듣곤 한다. 그럼 음악 축제의 음식은 어떨까?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맛있는 음식 먹는 걸 좋아한다. 맛집 찾아다니는 걸 낙으로 삼고, 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음악도 영화도 아닌, 음식 사진이다. SNS로만 보다 오랜만에 오프라인에서 만난 이들이 건네는 인사말 레퍼토리가 “맨날 맛있는 것만 먹고 다니고…”일 정도다. 그런 내가 음악 축제에 가서 음식 사진을 올린 적은 맥주 빼고는 거의 없다. 맛도 특색도 없기 때문이다.

혹시 피스트레인이라 쿨피스?

음악 축제에는 보통 푸드존이 있다. 소시지, 감자튀김, 피자, 햄버거, 바비큐, 치킨, 덮밥, 김치말이국수…. 다양한 음식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 거기서 거기다. 맥주 안주로나 끼니 때우기엔 그럭저럭 나쁘지 않지만, 밖에서라면 일부러 찾아다니며 먹지는 않을 음식들. 그런데 이런 음식이 음악 축제만 오면 비싸진다. 사먹는 것도 쉽지 않다. 현금이나 신용카드 대신 ‘티머니’로만 받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푸드존에 입점한 업체들이 올린 수익의 일부를 주최사와 나누는 구조라 매출을 파악하기 위한 조처라고 한다. 평소 티머니를 쓰지 않는 나는 일부러 티머니 카드를 사서 충전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음악 축제에서 음식에 관한 한 좋은 기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더 많은 건 그 때문이다.

이번엔 달랐다. 지난 6월23~24일 강원도 철원군에서 열린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얘기다. 이 축제는 영국의 세계적인 음악 축제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메인 프로그래머 마틴 엘본이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올해 처음 열렸다. 지난해 서울국제뮤직페어(뮤콘)와 서울 홍익대 앞 음악 축제 ‘잔다리페스타’를 찾은 엘본은 관광차 DMZ(비무장지대)에 갔다가 무릎을 쳤다. “평화를 기원하는 음악 축제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것이다. 그는 이번 축제를 열면서 “한반도에서 평화가 이뤄진다면 전세계 어디든 평화가 퍼져나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번 축제에 대해 여러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앞서 밝혔듯이 오늘은 음식 얘기에 집중하겠다. 6월23일 오전 9시35분 서울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운행하는 DMZ 피스트레인에 올랐다. 150명에게만 허락된 세 칸짜리 특별열차였다. 열차 안에선 록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라이브 공연과 축제에 대한 토크쇼 등이 이어졌다. 출출해진 나는 승객들에게 나눠준 패키지 속 간식 주머니를 펼쳤다. 기차여행의 ‘필수템’인 삶은 달걀 두 개와 캔음료가 들어 있었다. 사이다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추억의 유산균음료 ‘쿨피스’였다. 엽기적으로 매운 떡볶이를 먹는 것도 아닌데 웬 쿨피스? 쿨피스가 캔으로도 나왔나? 온갖 잡생각을 하다 머릿속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혹시 피스트레인이라 쿨피스? 맞았다. 주최 쪽은 음료 하나 고르는 데도 세심했다.

패키지 안에는 점심 도시락도 있었다. 김밥 대신 낯선 음식이 들어 있었다. 지진 두부를 갈라 양념간장으로 간한 밥을 채워 넣은 ‘두부밥’이다. 도시락 뚜껑에는 “식량배급이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절 길거리 음식으로 시작한 북한의 대표적 영양간식”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함께 든 찐만두도 여느 만두와 달랐다. “당면을 넣지 않고 두부, 채소, 고기로만 속을 가득 채운 이북식 만두”라는 것이다. 남북 평화의 염원을 담아 준비한 ‘평화 도시락’은 단순히 맛있는 걸 넘어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아니, 이 귀한 걸 서비스로요?”

기차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는 민간인통제선 안 월정리역으로 들어갔다. 서울과 함경남도 원산을 오가던 경원선 기차역이었으나 분단 뒤 폐쇄된 곳으로, DMZ 남방한계선과 가장 가까운 남쪽 마지막 기차역이다. 끊긴 철로 앞에 세운 무대에서 백현진과 방준석이 결성한 듀오 ‘방백’, 강산에, 영국 싱어송라이터 뉴턴 포크너가 노래했다. 공연을 보다 화장실에 갔더니 옆에 작은 매점이 하나 있었다. 간이 테이블에서 술판을 벌인 이들이 있었다. 우리도 철원 생막걸리와 안주 한 접시를 시켰다. 이 지역에서 수확한 목이버섯을 양념해 볶은 것이었다. 탕수육에 들어가는 재료로만 알았던 목이버섯이 이렇게 맛있는 줄 미처 몰랐다. 지금껏 음악 축제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꿀맛이었다. 버스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버스를 타고 민간인통제선을 빠져나와 고석정에 도착했다. 한탄강 중류에 있는 철원 팔경의 하나로, 임꺽정의 전설이 있는 명승지다. 고석정 인근에 잔디광장, 놀이공원 고석정랜드 등이 있는데 이곳에 축제 메인 무대인 ‘피스 스테이지’와 ‘플레이 스테이지’가 설치됐다. 두 스테이지 사이 광장에 푸드존이 마련돼 있었다. 축제를 위해 문을 연 푸드트럭과 부스가 늘어서 있었다. 광장 주변에선 원래 있던 지역 식당들이 손님을 맞았다. 페스티벌 푸드존과 지역 식당과의 자연스러운 공존. 축제 취지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지역 맛집이라는 고깃집 앞 평상에서 술판을 벌였다. 오가던 음악인, 음악평론가, 기자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판이 커졌다. 주인장은 육회를 서비스로 내왔다. “아니, 이 귀한 걸 서비스로요?” “먹어보고 맛있으면 또 오세요.” 축제가 아니어도 일부러 찾아올 만한 맛이었다.

축제의 의미 곱씹게 하는 음식

저녁에는 매운탕집에 들어갔다. 한탄강에서 잡은 메기와 잡고기들로 끓인 민물매운탕을 시켰다. 잡고기라지만 사실 하나하나 다 제 이름을 지닌 물고기다. 다양한 이름과 생김새의 물고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이렇게 훌륭한 맛을 내다니! 다양한 개성의 음악인들이 어우러져 멋진 축제를 만드는 것과 꼭 닮았다. 빈 소주병이 쌓이는 동안 나는 음식을 통해 축제의 의미를 새삼 곱씹었다. 이번 축제에서 먹은 음식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내년에도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에 간다면, 5할은 음식 때문이리라.

서정민 문화부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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