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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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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리 살인 사건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유력자 양성춘의 피살

당파싸움 끝 고의살해인가? 단순사고인가?
등록 2018-07-03 08:11 수정 2020-05-02 19:28
1910년 즈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거리 풍경(위쪽). 2018년에 촬영한 옛 개척리 자리인 포그라 니츠나야 거리.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1910년 즈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거리 풍경(위쪽). 2018년에 촬영한 옛 개척리 자리인 포그라 니츠나야 거리.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였다. 1910년 1월23일 늦은 저녁이었다. 추위가 절정에 달한, 겨울이 깊은 때였다. 이른바 ‘일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바로 그해였다. 나라가 망하기 불과 7개월 전이었다.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대한제국의 망국이 임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던 때였다. 또 그때는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무대로 하여 동분서주하던 안중근이었던 만큼, 개척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충격과 감격이 가시지 않았다.

개척리란 한인들의 밀집 주거지 ‘코레이스카야 슬로보드카’를 지칭하는 한국어 명칭이었다. 바로 코리아타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0년쯤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1만400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①

아랫배에 총 맞고 4일 만에 숨져
아들 얼굴을 토대로, 상상으로 그린 정순만 초상화(이재갑 작)(왼쪽). 정순만의 가장 가까운 동지 이상설. 상동청년회가 있었던 상동교회 1900년. 독립기념관 제공

아들 얼굴을 토대로, 상상으로 그린 정순만 초상화(이재갑 작)(왼쪽). 정순만의 가장 가까운 동지 이상설. 상동청년회가 있었던 상동교회 1900년. 독립기념관 제공

이 중에서 약 70%에 해당하는 7500명이 개척리에 모여 있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인구가 약 8만 명이었음을 참작하면,② 개척리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수는 전체 도시 인구 가운데 근 10%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피살자는 한인이었다. 집주인 양성춘(楊成春)이라는 사람이었다. 아랫배에 총을 맞은 그는 다량의 출혈 끝에 4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는 십수 년 전에 이주한 덕분에 러시아 국적까지 취득한 고참 이주민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한국말로 ‘원호’(元戶)라고 했다. 자산도 넉넉했고, 러시아어도 불편하지 않게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개척리 한인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유력자였다. 2년 전에는 한인 거류민회 ‘민장’까지 지낼 정도였다. 러시아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한인 자치단체의 대표였다. 개척리의 자치단체 대표로 선출될 만큼 한인들 사이에서 신망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언론기관의 보도에 따르면, “마음이 공평 정직하여 동포 사회에 공익을 극력 도모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③

도대체 누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범인은 금방 밝혀졌다. 그도 한국 사람이었다. 살인 혐의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범인은 37살의 정순만(鄭淳萬)이었다. 그는 피살자와는 달리 러시아로 이주한 지 겨우 3년도 안 된 신참 이주민이었다. 아니, 이주민이라기보다는 망명자였다.

정순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애국지사’라고 일컬을 만큼 항일투쟁 경력이 혁혁한 이였다.④ 본래 충청도 청주의 유생 출신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재야의 큰 유학자로 전국에 명성이 자자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나아갔다. 그 문하에서 유교 고전학 연구와 시문 제술에 전념했다. 뒷날 언론인으로서 필봉을 휘두르던 기본 소양은 이 시절에 갖춰졌을 것으로 보인다.

20대 청년기에 들어서 정순만은 급진적인 서구화 개혁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반정부 비밀결사 유신당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독립협회의 후신이라는 평을 듣던 상동청년회에 참가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나아가 한국 최초의 적십자사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보수적인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니, 민심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선고받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곤장형 집행장에서는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고난 속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신뢰였다. 유신당 사건으로 함께 투옥된 정순만, 이승만, 박용만 세 사람은 뒷날 ‘독립운동계의 3만’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서 보듯이 사람들의 큰 신망을 얻었다.

러일전쟁(1904~05년)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 노골화되자, 정순만은 그에 맞서 항일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황무지 개간을 표방하며 한국 토지 침탈에 나선 일본 상업자본과 군대에 목숨을 내걸고 감연히 맞섰고, 일본인 중개상이 주도하는 한국 노동자 멕시코 송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05년 을사강제조약이 공포되자, 그에 맞서 서울에서 대중적인 시위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범인은 항일투쟁 망명자 정순만[%%IMAGE3%%]

정순만은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1906년 4월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국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국경 너머 근 100만 명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북간도와 연해주가 곧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두 지역을 합쳐서 ‘해도’(海島)라고 했다. 연해주의 ‘해’자와 북간도의 ‘도’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었다. 해도는 망명자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자, 약속의 땅이었다.

망명 동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설(李相卨)은 언제나 믿고 의지하는 평생 동지였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같은 충청도 출신인데다 기질과 성향이 맞았다. 두 사람은 형제간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상설은 정순만보다 세 살이 더 많고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이상설이 앞서고 정순만이 뒤를 따랐다. 일본 정보 문서에는 정순만이 이상설의 ‘심복’이라고 표현돼 있었다.⑤

기울어가는 국운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망명자들은 과연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갖고 있을까? 그랬다. 이상설과 정순만을 비롯한 망명자들이 갖고 있던 복안은 말하자면 ‘해도 거점 임시정부 수립론’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 황제를 연해주로 망명케 하고, 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구상이었다. 1910년 화서학파의 저명한 유학자 유인석과 이상설이 앞장서서 ‘13도의군’을 편성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 복안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상설이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중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망명자들은 러시아의 협력을 낙관했다. 왜냐하면 러일전쟁에 패배한 뒤 러시아인들은 조야를 막론하고 일본을 향한 복수심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상설과 정순만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세력이 조직됐다.

이 그룹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양반과 고위 관료 출신자가 중심을 차지했다. 이상설 자신이 ‘종2품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자격으로 활동했고, 대한제국 정부에서 관료를 지냈던 망명자들은 대부분 이 그룹에 합류했다. 둘째, 러시아 행정 당국과 교섭력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뒀다. 특히 연해주 관내의 정치활동 단속을 책임진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에 능동적이었다.

이런 특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반이나 관료적 전통과 거리가 먼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자들 속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양반·관료 주도의 행동 양상은 낡은 것으로 간주됐다. 평민적 지향성이 강할수록 그랬다. 또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하는 것은 스파이 활동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헌병대에서 급료를 받고 정기적으로 한인 사회의 내막을 전하는 행위를 비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피살을 둘러싼 두 견해

도대체 정순만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개인적 원한이나 이해관계 탓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두 사람 사이에 금전 거래가 있었다거나, 여성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는 정황은 어느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정보도 찾을 수 없다. 살인 사건의 동기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견해가 제기됐다. 그중 하나는 피해자 쪽에서 바라본 것이다. 당파적 분노와 적개심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고의로 살해했다는 의견이었다. 사건이 있던 그날 낮에 거류민회에서 중대한 회의가 있었다. 한인 사회의 내부 알력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갈등이 격화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충돌했다. 그날 저녁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동기는 분노 때문이었다. 자신의 견해가 무시되고 백안시된 데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그가 이례적으로 권총을 갖고 방문한 것은 처음부터 살해할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방문 첫마디에, “오늘 거류민회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일이 너무 분하다. 너를 죽이러 왔다!”고 큰소리친 행위도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견해였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에 관한 또 하나의 견해는 과실치사설이었다. 가해자 정순만이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에서 견지했던 견해가 바로 이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이유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성춘은 정순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정순만은 분노와 절망에 빠졌다. 휴대한 권총을 빼든 그는 “이렇게 탁한 세상에 생존할 바에야 지금 자살하겠다”고 부르짖었다. 깜짝 놀란 양성춘이 자살을 막으려고 권총을 뺏으려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권총이 오발됐으며, 불행하게도 총알이 양성춘의 아랫배를 맞히고 말았다. 이것이 정순만이 묘사한, 사건의 진상이었다.⑥

이 견해에 따르면, 양성춘은 숨을 거두기 전 가족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이 사건이 사고로 난 것임을 설명하고 자신의 사후에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한인 거류지를 감도는 긴장감

러시아 사법기관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변호사를 고용해 적극적 방어에 나섰다. 마침내 판결이 이뤄졌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해 11월 초였다. 피고 정순만은 3개월 금고형과 정교 사원에서 참회를 명받았다. 피고인 쪽의 승리였다. 고의 살해가 아니라 과실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1911년 2월8일, 마침내 형기를 마친 정순만이 출옥했다. 양성춘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1년 남짓 만에 가해자가 돌아왔다. 모든 형사처벌을 마친 상태에서 한인 사회의 일상생활에 복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거류지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현규환, 상, 어문각, 1953판. 814-815쪽
② 제61호 1908년 5월6일치
③ ‘양씨피살상보’, 1910년 4월24일치
④ ‘정순만씨의 역사’, 1909년 5월5일치
⑤ 박걸순, ‘연해주 한인사회의 갈등과 정순만의 피살’, 34, 독립기념관, 2009년판
⑥ 박민영,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충북인의 활동’, 학술회의 발표문, 2011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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