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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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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나의 힘

상처는 관계를 깨기도 하지만 서로를 연결하기도

자기 인생을 지키고 눈물을 닦는 건 자신일 수밖에
등록 2018-06-19 16:59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4월 초인데 진눈깨비가 내렸다. 난데없는 눈발에 벚꽃도 파리했다. 퇴사하고 며칠 뒤 엄마와 간 제주도 여행에서 덜덜 떨었다. 그래도 벚꽃 앞에서 사진은 한 장씩 찍었는데 표정이 노역에라도 끌려온 것 같다. 당시 엄마는 내가 백수가 된 줄 몰랐다. 나는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끊느라 줄어든 통장 잔고 탓에 더 추웠다.

“여기서 30분만 걸으면 도두봉(도들오름)이 나와요. 일몰이 멋있어요.” 게스트하우스 주인아줌마 말만 믿고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머리가죽이 벗겨질 것 같았다. 허연 이를 드러낸 바다를 보고 속이 시원하다고 한 5분 정도 감탄했다. 곧 손이 곱아 사진 찍기도 귀찮았다. 도가니가 시큰거리는데 도두봉은 도통 코빼기도 안 보였다. 중년의 딸과 70살 엄마는 서먹해서 그냥 걸었다.

제주 해변의 ‘설악 막국수’

“대체 왜 제주도 해변에 ‘설악 막국수’ 집을 열었을까?” 엄마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킹콩 부대찌개를 왜 제주도 해변에 차렸을까?” 죽 늘어선 펜션들엔 ‘산타루치아’ 같은 난데없는 유럽 도시 이름을 따온 간판이 걸렸다. 제주도에서도 여기가 아닌 다른 데를 꿈꾸나보다.

할 말이 달랑달랑하자 엄마는 옛날 얘기를 꺼냈다. 예전에 엄마가 신세타령할 때면 마음속 셔터를 반쯤 내렸다. 엄마의 삶을 내가 보상해줘야 할 것 같은데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한탄은 묵직한 죄책감으로 내 마음에 가라앉아 있다가 이상한 시점에 분노로 터져나오곤 했다. 엄마와 내 경계를 없애고 해결사로 나서겠다고 오지랖을 떤 사람은 나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엄마가 20살일 때도 산타루치아같이 이곳 아닌 데를 애타게 꿈꿨을까? 육 남매 중 큰딸인 엄마의 청춘은 알바천국이었다. 너무 흔한 가족사라 내 얘긴가 싶으면 네 얘기인 그런 사연이다. 호인인 할아버지가 누구 보증을 섰다가 집안이 망했네, 할머니가 머리에 흰 띠 두르고 드러누웠네, 하는 그런 이야기다. 할머니의 ‘아이고’ 소리에 맞춰 엄마는 알바의 달인으로 단련돼갔다.

그런 엄마가 20살 어느 여름의 기억 때문에 제주도 해변에서 목이 멨다. 눈물이 맺혔는데 칼바람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50년 전 일인데도 그 순간의 고통이 신선도 100%로 해동돼 흘러넘쳤다.

아주 쉬운 알바 자리라고 옆집 아줌마가 소개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했다. 요즘 말로 ‘인간 펼침막’ 같은 일이었다. 문제는 엄마가 서 있어야 했던 곳이 또래 아이들이 ‘고데기’로 머리를 한껏 부풀리며 전공도서를 팔에 끼고 돌아다니는 한 대학이란 점이었다. 엄마는 혹시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날까봐 알바 시간 전에 도착할 때면 그 대학 화장실에 숨어 있곤 했다. 사실 엄마가 했던 여러 알바에 비해 ‘객관적’ 기준으로 별것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순간들이 진눈깨비 내리듯 난데없이 쏟아져 현재의 벚꽃마저 얼려버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 시절의 고통을 다시 겪었다. “시선 때문이었던 것 같아. 내 또래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 물체같이 시선을 받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 모멸감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고, 어떤 수치 같기도 했어.” 보는 사람과 보이기만 해야 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정말… 너무 초라하게….” 파도 소리 때문인지,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자기가 아는 죄와 모르는 죄

50~60년 전 고통의 기억이 아직도 생방송 중인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동창회를 준비하던 엄마는 “쇼킹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동창이 기부금은 내면서도 죽어도 동창회에는 안 나오겠다고 버티는데 그 이유가 엄마 때문이란다. 엄마는 그 사람이 잘 기억도 안 나 옛 앨범을 꺼내 봤다. 전화를 걸어보니 그 노인이 된 친구는 다짜고짜 울분을 토했다. 고1 때 친한 사이였는데 하루는 그 친구가 결석을 했다. 엄마랑 몇 명이 집에 찾아갔다. 그 친구 말은 이랬다. “우리 집이 가난했잖아. 너네가 대문 열고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이상했어. 그때부터 나를 따돌렸다고!” 엄마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들어도 기억이 안 났다. 미안하다고 긴 사과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아는 죄, 모르는 죄를 짓나보다.” 나는 엄마가 실제 그 친구 집에 발을 들여놓을 때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엄마 형편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그 친구의 고통이 거짓도 아니다.

어떤 상처는 평생 진물 나는 옹이로 남는다. 그 울퉁불퉁한 표면 위에 경험들이 우둘투둘 쌓여 흉터로 자리잡는다. 이승욱은 에 이렇게 썼다. “처음의 경험은 이후의 유사한 일들을 인식하는 데 원구조로서 기능하죠. 그래서 처음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후에 발생한 일들은 왜곡된 상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0살로 돌아간 엄마가 울 때, 나는 그 젊은 여자 곁에 있었다. 이제야 좀 알 것도 같다. 엄마나 나나 눈물은 스스로 닦을 수밖에 없다는 걸, 쓸쓸하지만 자기 인생을 지키는 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는 들으려 애쓰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영 잘 안 된다.

엄마 인생의 상처를 보상하는 존재가 될 수 없고, 되지 않아도 된다는 내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들을 때, 70살인 엄마와 40대인 나는 처음으로 두 소녀로 만났다. 그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었다. 상처는 관계를 부수기도 하지만 타인과 나를 연결하기도 하나보다. 나에게도 모멸의 기억은 있으니까. 모두 상처 받으니까. 이승욱은 자기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여자의 허황함, 모든 인간의 허황함, 모든 인간의 소년과 소녀가 만들어낸 환상과 집착의 허황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슬퍼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어리고 아픈 소녀였습니다. …오늘은 나무 뒤 어딘가에, 떨어진 잎새 어딘가에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을 어머니를 향해 자그맣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도두봉으로 가는 길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걷다 서다 반복하며 해가 얼마나 바다에 닿았는지 확인했다. ‘바이킹 펜션’ 간판이 잘 안 맞는 틀니처럼 덜덜거렸다. 바닷바람에 날아갈 것처럼 선 엄마, 울고 있는 소녀를 품은 노인이 이렇게 뇌까렸다. “해가 뜰 때도 꼴깍 뜨더니 질 때도 후루룩 져버린다지.”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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