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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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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하는 노래

대중가요 제목과 노랫말에 자주 등장하는 ‘사랑’

설레는 마음을 대변하거나 실연의 아픔을 위로하거나
등록 2018-03-27 18:14 수정 2020-05-03 04:28

이문세(위)의 <옛사랑>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추억의 명곡이다. 서정적 노랫말을 잘 짓는 걸로 유명한 고 이영훈 작곡가의 작품이다. 한겨레

이문세(위)의 <옛사랑>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추억의 명곡이다. 서정적 노랫말을 잘 짓는 걸로 유명한 고 이영훈 작곡가의 작품이다. 한겨레

라는 책을 봤다. 한성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썼다. ‘유행가에서 길어 올린 우리말의 인문학’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대중가요 노랫말을 분석해 풀어낸 책이다. 학자답게 주관적 감상보다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삼았다. 근대 대중가요가 태동한 시기인 1920년대 초부터 2016년 11월까지 나온 노래를 정리해 2만6천여 곡을 분석했다. 노래방 업체 자료가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 결과 흥미로운 통계가 많이 나오는데, 예컨대 이런 것이다. 노래 제목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다들 예상하듯 ‘사랑’이다. 2만6천여 곡 중 2237곡 제목에 들어갔다. 다음으로 ‘나’(1357곡), ‘너’(884곡), ‘그대’(463곡), ‘사람’(352곡) 순이었다.

노랫말에 많이 쓰인 단어 ‘나’와 ‘너’

노랫말을 따져보면 뜻밖의 결과가 나온다. 노랫말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사랑’이 아니라 ‘나’다. 22만9272번 쓰였다. 다음은 ‘너’(12만8781번), ‘것’(8만5425번) 순이다. ‘사랑’은 8만2782번 쓰여 4위에 올랐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나’ ‘너’ ‘것’은 말이든 글이든 자주 쓸 수밖에 없는 단어다. 게다가 노래라는 게 1인칭이 2인칭에게, 다시 말해 내가 너에게 들려주는 것임을 감안할 때 이는 당연한 결과다. 따지고 보면 노래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나’와 ‘너’는 사랑하고 있거나 과거에 사랑했던, 또는 사랑하고 싶은 사이다.

노랫말에 ‘사랑’이 한 번이라도 쓰인 노래 수를 따져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난다. 전체 2만6천여 곡의 65%에 해당하는 1만7천여 곡에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갔다. 여기에 ‘러브’와 ‘love’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노랫말에 ‘사랑’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해서 사랑 노래가 아닌 건 아니다. 사랑을 다른 말로 돌려 표현한 노래도 많음을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다. 이 모든 걸 감안하면 노래 중 으뜸은 역시 사랑 노래다.

왜 이렇게 사랑 노래가 많은 걸까?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창작자 쪽이 아니라 노래를 듣고 찾는 사람들 쪽에서 해답을 찾는 게 좋을 듯하다. 노래를 가장 많이 듣고 찾는 세대는 아무래도 젊은층이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인 10대와 20대가 가요의 주된 소비자다. 이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 사랑에 아파하는 마음…. 이런 마음을 대변해주는 노래에 자연스레 끌릴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랑 노래가 사랑받으니 창작자들은 사랑 노래를 더 많이 만들고 부르게 된다.

사랑 노래라고 다 같은 사랑 노래가 아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단계의 설렘, 한창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을 무렵의 행복, 짝사랑, 이별의 아픔, 사랑 끝에 밀려오는 후회와 미움,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 사랑에서 파생된 수많은 감정을 노래에 담는다.

‘이런 아픔을 나만 겪는 게 아니구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이의 설렘을 잘 표현한 노래로 이상우의 만 한 것이 없다. 첫 만남 이후 세 번째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내 모습이 괜찮은지 쇼윈도에 비춰보고, 하늘에 뜬 구름은 솜사탕처럼 달콤해 보이고, 오늘은 용기를 내어 고백하겠노라고 다짐하는 이 남자. 그 고백의 결말은 알 수 없어도 왠지 설레고 기분 좋아지는 노래다. 대중가요는 아니지만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하는 판소리 의 도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노래다.

하지만 이처럼 기쁘고 행복한 노래보다 아픈 사랑 노래가 훨씬 더 많다. 노래 속 주인공은 늘 짝사랑에 아파하고, 이별에 아파하고, 헤어진 그 사람을 못 잊어 아파한다. “늘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 늘 혼자 추억하고 혼자 무너지고/ 사랑이란 놈 그놈 앞에서/ 언제나 난 늘 빈털터리일 뿐”(바비 킴 )이라고 짝사랑의 아픔을 노래하고, “이제 다시 사랑 안 해/ 말하는 난 너와 같은 사람/ 다시 만날 수가 없어서/ 사랑할 수 없어서”(백지영 )라며 너무 아파 다시는 사랑 않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은 밝고 기쁜 노래를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왜 그 반대일까? 내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사랑에 빠져 행복에 겨울 때 굳이 다른 노래가 들어올 틈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좋으니, 노래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이별 뒤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이런 아픔을 담은 노래가 나를 위로해주는 것이다. ‘이런 아픔을 나만 겪는 게 아니구나’ 하며 위안을 받을 수도 있고, 슬픈 노래로 아픈 마음을 더 깊이 후벼파 되레 무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글쓴이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기쁠 때 곁에 있는 사람보다 슬플 때 함께 있어주는 이가 더 고마운 법이다. 그래서 노래는 슬픈 사랑 타령이다.”

사랑의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으면, 그 자리에 그리움이 싹트는 법이다. 원망하고 미워했던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 애틋한 사람이 되곤 한다. 그래선지 이별의 아픔 못지않게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 또한 많다. 이런 노래는 아주 오래전 사랑했고 이별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더 폭넓은 세대, 더 많은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다.

슬픈 사랑 노래가 더 아름답다

이런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이문세의 이다. 선율도 잘 만들지만, 웬만한 시보다도 아름다운 노랫말을 잘 짓는 걸로 유명한 고 이영훈 작곡가의 작품이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흰 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광화문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영화로 치면 흑백이어야 할 것 같다. 거꾸로 올라가는 눈송이처럼 시간도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옛사랑이 지금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부질없다. 노래는 노래일 뿐이다. 그래서 슬픈 사랑 노래가 더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서정민 씨네플레이 대표·전 대중음악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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