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첫째 딸 학교 과학 선생인 마크의 소개로 그의 사위이자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직업 아티스트 제러드를 만났다. 토요일 오후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 우리를 맞은 사람은 마크의 딸 줄리엣이었다. 불타는 듯 풍성하게 출렁이는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줄리엣에 이어 곧바로 마크와 제러드가 우리를 맞았다. 중키에 다소 긴장한 인상의 제러드는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곧바로 아이의 작품을 보고 싶다 했다. 만남에 앞서 신경이 곤두선 듯했던 아이는 머뭇거리며 작품들을 펼쳐 보였다.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아이에게 제러드는 연거푸 다행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찾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만일 재능 없는 친구가 오면 뭐라 해야 하나 엄청나게 걱정했어. 난 거짓말을 못하거든. 그런데 너는 기대를 훌쩍 넘어서는구나. 대단한 재능이야. 지금 실력으로도 전시가 가능할 정도란다. 물론 이해해. 네가 네 작품을 못 견뎌 하고 좌절감에 쌓여 지내는 것도. 그게 아티스트의 운명이야.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극복하고 세상에 네 작품을 보여줘야 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거란다. 네가 나를 찾아온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야.”
한두 시간 이야기하는 걸 예상하고 갔는데, 세 시간 넘게 그의 집과 작업실에 머물렀다. 제러드는 집 옆에 붙은 작업실에 데려가 작업 과정을 보여주고 프로그램을 이용해 3차원(3D) 이미지 만드는 법도 가르쳐줬다. 실질적 조언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알맞은 학교 추천과 입학에 도움이 될 편지까지 써주고 싶다는 말도 전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잘 안다는 제러드의 말에 수줍게 물러서 있던 아이의 긴장이 녹아내리는 게 보였다. 제러드가 말했다.
“난 어릴 때 괴물 그림만 그리고 싶었어. 그런데 학교를 가야 했고, 하물며 그림 배우러 간 곳에서조차 별 관심 없는 정물화나 풍경화 같은 것을 그리게 하는 거야. 어디를 가든 부적응자 같았고 세상은 지루하게만 돌아갔지. 지독하게 조용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지내는 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단다. 그런데 여기 줄리엣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그의 파티에 초대받았지. 아마 그날 마크를 처음 만났을 거야. 마크는 그때도 스스럼없고 개방적인 사람이었지. 그날 이후 우리 모두는 좋은 친구가 되었어. 줄리엣과 나는 같은 중학교를 나왔는데 그때까지 서로 말조차 거의 섞지 않는 사이였는데도 말이야. 줄리엣은 언제나 사람들 중심에 있고 유쾌하고 인기 절정의 아이였고, 나는 고독한 늑대 같은 소년이었지. 줄리엣은 나처럼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인간에 비해 너무 낙천적이고 밝고 쾌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다 중학교 졸업이 다가왔고 마지막으로 한번 가보자는 생각에 파티에 갔다가 줄리엣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단다. 그리고 인생이 바뀌었지. 난 거기서 평생의 사랑을 만났고, 또 내가 가야 할 길로 가기 위한 첫 발걸음을 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날 줄리엣이 자기가 다니기로 한 예술고등학교를 내게 추천했어. 너야말로 거기에 꼭 가야 할 사람이라고. 이미 원서 접수가 끝나 뒤늦게 준비해서 다음 학기에 들어갔지.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 줄 알아? 나는 거기서 아주 쿨하고 멋진 아이가 되었단다. 하물며 농구팀 주전으로 뛰었지. 왜 그런 줄 알아? 다른 아이들이 나보다 더 농구를 못했거든, 하하.”
이제 임신 6개월인 줄리엣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연기를 전공했어. 다른 전공이라도 모두 잘 아는 분위기라 학교에선 새로 들어온 신비로운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어. 난 그를 먼저 안다는 이유로 굉장히 으쓱했단다. 그곳에서 그가 얼마나 활짝 피어오르는지 지켜볼 수 있었지. 함께 성장한다는 기쁨은 어마어마한 거였어.”
열정적 사랑의 매혹도 좋지만제러드는 할리우드 영화나 대형 비디오게임 제작 시스템 내에서 캐릭터 디자이너로 일하는 동시에 뜻이 맞는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 가운데 많은 것이 아내 줄리엣을 모델로 했다. 제러드는 자신이 만든 숱한 엘프(요정)와 괴물, 기이한 창조물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화난 줄리엣이야. 이 엘프는 우울한 줄리엣, 이건 유쾌한 줄리엣….”
줄리엣의 어떤 형질을 담아서 그는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줄리엣뿐 아니라 마크의 특징적 모습을 담은 캐릭터도 있었다. 제러드는 마크와 줄리엣은 물론 다른 친구들을 배우로 단편영화도 제작했다며 스틸컷도 보여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업을 구체적으로 알고 소통하는 듯 관련 이야기를 자유롭게 주고받기를 멈추지 않았다. 줄리엣은 제도권 내에서 아직 이름을 널리 알린 배우는 아니지만, 피트니스 강사로 일하며 크고 작은 영화와 연극에 출연하고 있었다. 현재 어떤 사회적 인정을 받는지와 상관없이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성장하는 중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관계의 균형은 한눈에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들은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관계에서 두터운 신뢰를 만들었다. 알면 알수록 나눌 것이 더 많아져서 사랑과 신뢰가 깊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마크도 그들의 작업에 기꺼이 참여했고 그 모든 기록이 제러드의 작업실에 정리돼 있었다. 사랑과 관계의 박물관을 찾은 기분이랄까. 한 가족의 기록이 20년가량 세월의 더께를 입고 크고 작은 작품 형태로 컴퓨터 파일 안에, 그리고 작업실 안 사진과 포스터와 모형물로 남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 많은 상념이 쏟아졌다. 그간 외로움이 많았던 듯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좋았다고, 같이 가줘서 고맙다고. 아이는 긴장이 풀렸는지 바로 잠에 빠졌다. 잠들기 전 아이는 말했다.
“제러드와 줄리엣이 중학생 때 만나서 지금껏 성실히 사랑하며 산다는 거, 참 멋지지 않아?”
사랑에 성실이란 말을 붙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는 안다. 열정적 사랑의 매혹도 좋지만, 성실한 사랑의 깊고 듬직한 힘을 살면서 더욱 깨닫는다. 함께 성장하고 서로 격려하고 끊임없이 상대를 알고 배려하는 삶이란 성실함과 주의 깊음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나는 내 아이를 둘러싼 성실한 사랑의 과정을 아이의 학교에서 느끼고 있다.
나와 아이들은 현재 공교육 시스템이 잘 자리잡지 못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살고 있다. 학군이 좋은 지역으로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몇몇 알려진 사립학교를 지원하는 수밖에 해결책이 없다. 2년 전 한창 이혼소송으로 정신없던 시간을 보내던 때, 첫째의 중학교 입학 과정을 치러야 했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한국에 돌아올 계획이었기에 한국 학교만 알아봤지 미국 학교 입학을 위해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부모 모두의 동의 없이는 아이 거주지를 함부로 옮길 수 없다는 제약과 아이 아빠가 급작스럽게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한국행은 무산됐다.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혼란스러운 과정이었다.
아이 설득을 멈추지 않은 이유우여곡절 끝에 두 차례 학교를 옮겨야 했고, 중학교 2학년에서 과정이 끝나는 현재의 학교로 중2 과정 1년만 다닐 예정으로 아이를 입학시켰다. 그곳에서 아이는 과학 선생 마크를 만났다. 그는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가 어느 날 수업 중 친구에게 보낸 쪽지에 그린 그림을 보고 아이에게 귀띔했다. 과학 숙제를 글로 적어내는 대신 만화로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제출한 과제로 아이는 훌륭한 점수를 받았다. 수학과 영어 첫 수업에서는 꽤 우수한 실력을 보이던 아이가 몇 차례 수업이 이어지자 집중력을 잃는 것을 보고 교장인 홀리는 아이를 만나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면담 뒤 홀리는, 수업 과정보다 높은 실력을 보이는 스페인어 수업 대신 그 시간에 미술 선생을 도와 특별 미술 수업을 하는 임무를 아이에게 맡겼다.
조건은 있었다. 조금 지루하더라도 수학과 영어 수업에 집중하도록 노력해볼 것. 당장 재미있지 않는 것에 너무 일찍 가능성을 닫아버리지 않고 관심을 두고 기다리는 연습을 해볼 것. 학기 말 학부모 면담 시간에 알게 된 사실로는, 아이는 홀리에게 학교가 지루하고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모양이다. 원서를 넣은 고등학교 어느 곳에도 들어갈 의사가 없다는 말도. 그 말을 듣고도 홀리를 비롯한 다른 선생들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아이 설득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들의 설득은, 자신이 옳다는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아이의 재능과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실험하고 추구하는 행위를 존중했다. 다만 그들의 역할은, 아이가 가진 것을 더 현명하고 유용한 방식으로 그들의 시스템 안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각자의 자리에서 소임에 충실하기에 만나서 설득하고 성장 과정을 누릴 수 있음을 감사하자고 했다. 학부모 면담에서조차 너무나도 당당하게, 고등학교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홀리는 말했다.
“세상에는 좀더 많은 가능성이 있단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건 네가 더 큰 가능성을 찾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야. 우리 모두 네가 얼마나 예술을 좋아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지 알아. 오직 예술에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해. 그렇게 한다면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해. 하지만 예술이란 건, 경험을 넓히고 삶과 세계를 경험하고 배우면서도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네게 주어진 가능성을 미리 결정하고 닫아버리기엔 너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 많잖니. 만일을 위해서라도 기회를 쉽게 미리 차단하는 일은 하지 말자는 거야. 그런 면에서 학교교육이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닐 수 있어. 물론 네게 맞는 학교를 찾아야겠지만. 우리는 너와 함께 네게 꼭 맞는 학교를 찾고 싶단다.”
학부모 면담 뒤 학교에선 내게 아이를 보낼 수 있는 예술학교 목록을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기에는 지원 기간이 빠듯하다는 생각에 나와 아이는 지레 포기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크는 제러드와의 만남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아이에게 흥미로운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승낙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그리고 제러드와 만나고 이틀 만에 마크와 학교의 고등학교 입학 상담 선생 조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비록 입학 지원 기간은 지났지만 제러드가 졸업한 예술고등학교에 원서를 집어넣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제러드는 이미 추천서를 써줄 의사를 강력히 표명했고 부모가 허락한다면 마크와 학교가 나서서 원서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홀로 성장할 순 없다나는 이 과정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이가 어떻게 성실히 사랑받고 성장할 기회를 누리는지 볼 수 있음에 충분히 감사하다. 성장은 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학교는 아이가 성장하는 장소인 동시에 선생과 부모도 함께 자라나는 곳임을 경험하고 있다.
이서희 작가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화내서 미안” 명태균에 1시간 사과 ‘윤석열 음성’…검찰이 찾을까 [The 5]
[단독] 감사원, ‘최재해 탄핵 대응’ 간부 전원 소집…집단 반발하나
6·25 때 미그기 몰고 참전한 우크라 조종사들…윤석열 정부는 알고 있나
‘전속계약 해지 선언’ 뉴진스, 왜 ‘법적 조처’는 안 한다 했을까
한동훈, 정년 연장이 청년 기회 뺏는다는 지적에 “굉장히 적확”
한동훈 ‘도로교통법 위반’ 신고…“불법정차 뒤 국힘 점퍼 입어”
윤 대통령 지지율 다시 10%대로…직무수행 긍정평가 19%
구글맵 믿고 가다 15m 추락사…내비게이션 책임 물을 수 있을까?
음주 측정 거부하고 이탈 뒤 2주 뒤에 또…만취운전 검사 해임
‘TV 수신료 통합징수법’ 국회 소위 통과에…KBS 직능단체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