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거창한 버킷리스트는 없지만, ‘언젠가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꼭 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꽃과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삶. 이 꿈은 워낙 요원해서 가끔은 ‘포기할까’ 생각하지만, 그때마다 헤세의 정원이나 모네의 정원 사진을 꺼내 보며 ‘언젠간 꼭, 작은 정원이라도 만들고 싶다’며 어설픈 전의를 불태우곤 한다. 예술과 일상과 자연이 하나 되는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이야말로, 이룰 수 없어도 끝내 포기하고 싶지 않은 꿈들 중 하나다. 둘째, 나만의 작은 아카데미를 여는 것. 글읽기와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소박한 배움터를 하나 여는 것이 두 번째 소원이다. 글읽기와 글쓰기로 삶을 되돌아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열정적인 세미나가 열리는 배움터는 내 안의 소박한 유토피아다. 이 밖에 몇 가지 소원들이 있지만, 그 수많은 바람 중에서도 돈이나 시간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내공’이 부족해 미뤄둔 것이 바로 나의 오랜 멘토 H선생님과의 세미나였다. H선생님은 문학평론가로 평생 살아오셨지만 문학뿐 아니라 철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무엇보다 ‘곁에 있기만 해도 그저 좋은 사람’이었다. 선생님과 나 사이에 무려 30여 년의 나이 차가 가로놓여 있지만, 한 번도 나이 차가 우리의 우정을 가로막은 적은 없었다.
H선생님과 수다를 떨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빛이 우리 주위로 모여드는 것만 같았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커피 한 잔과 달콤한 치즈케이크여도 좋고, 소주 한 병과 얼큰한 순댓국이어도 좋았다. 그런데 얼마 전 선생님께서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나는 크게 낙담했다. 항상 건강하셨던 분이라 편찮은 모습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선생님은 워낙 침착하신 분이라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평소와 똑같은 말투로 전화를 하셨고, 나 역시 ‘절대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강한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명랑한 말투를 가장했다. 하지만 가슴속은 미친 듯이 타들어갔다. 아직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만, ‘진단’만으로도 나에게는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암 투병 H선생님과의 향연선생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진작 시작할걸. 이 세미나를 시작하면, 이 세상 어느 학교에서도 결코 배울 수 없는 H선생님만의 최고의 향연이 될 텐데.
나는 마음의 충격을 가라앉히고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우리 예전에 플라톤의 이야기 많이 했잖아요.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 밤새도록 수다를 떠는 그리스 사람들의 그 아름다운 심포지엄, 정말 좋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없어도, 단둘이서도 향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둘이서 향연? 얼마든지 가능하지.”
“우리 두 사람이 좋아하는 책을 각각 한 권씩 추천하고, 그 책에 대한 이야기로 한 번씩 세미나를 꾸리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플라톤에서 헤르만 헤세까지, 동서양 고전 중에서 한 편씩 교대로 추천하는 식으로요. 첫 책은 플라톤의 으로 시작하지요.”
“그래, 그러자.”
우리의 향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에뤽시마코스의 재발견선생님은 역시 기대를 뛰어넘는 무지갯빛 향연의 아름다움을 내 앞에 펼쳐 보이셨다. 우리는 얼큰한 순댓국과 빨간 뚜껑 소주로 일단 몸을 따뜻하게 데운 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둔 채 첫 번째 향연을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예 을 다시 번역해서 오셨다. 내가 읽은 어떤 보다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며 그야말로 천의무봉한 번역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첫 등장 자체가 예전과는 다른 처연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이 초대한 만찬에서 모두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혼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고 싶다’는 이유로 한참 동안 제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부재를 잠시도 견디기 힘들어한다. 어서 소크라테스가 자리에 나타나 그들의 그리움과 동경을 채워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시동을 시켜 ‘어서 소크라테스를 데려오라’고 재촉하거나, 선생께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실 것이니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두라고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고독할 자유, 혼자 있을 자유를 누리며, 만찬의 떠들썩함과 잠시 거리를 두고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향연의 새로운 면모가 보이는가 하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향연의 불가피한 보수성도 보였다. 나는 선생님께 볼멘소리로 고백했다.
“선생님,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이 그리스 남자들이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 하더라도, 저에게는 이 사람들이 못내 잔인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요. 이들이 말하는 사랑에서 ‘여성에 대한 사랑’은 철저히 배제되고, 게다가 이들은 ‘시동들’을 아무렇지 않게 부려먹으면서 태평스레 누워서 만찬을 즐기고, 시동들과는 전혀 인간적인 관계를 맺지 않잖아요. 아무리 이 시대의 한계임을 고려하더라도, 소크라테스도 이런 불평등과 차별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는 걸로 보여요.”
선생님은 나의 문제제기도 거리낌 없이 받아주셨다. 또 하나 새로운 발견은 의사 출신 ‘에뤽시마코스’의 말이다. 그는 음악에서 사랑의 본질을 찾았고, 사랑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감에 가두지 않았으며, 사랑이란 모든 존재의 움직임에서 용솟음치는 끝없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보았다. 나는 에뤽시마코스의 매력에 흠뻑 빠져서 선생님께 말했다. “음악이란 사랑의 현상학이라니, 이런 멋진 문장이 왜 그때는 안 보였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까 에뤽시마코스가 제일 멋있더라고.”
두 번째 세미나에서 우리는 을 함께 읽었다. 이번에도 선생님은 완벽하게 텍스트를 다시 번역해 오셔서 나를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하셨다. 소크라테스가 그야말로 목숨을 바쳐 자신의 올바름을, 무죄를, 나아가 그럼에도 반드시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논증하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때로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때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마치 소크라테스가 수천 년의 시간적 간극을 뛰어넘어 우리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느꼈다.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지켜보던 제자들이 어느새 하나둘 울음을 터뜨리며 기어이 눈물바다가 되는 장면에선 나와 선생님도 코끝이 찡해지며 낭독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토록 감동적인 을 한줄 한줄 낭독하는 세미나를 마치고 나는 기어이 산통 깨는 발언을 하고 말았다.
낭독 뒤 깨진 산통“선생님, 마지막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최후가 감동적이기는 한데요, 어떻게 아내에게 이럴 수 있지요? 평생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아이들까지 키워준 아내인데,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어서 집으로 보내버리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석연치 않아요. 아내와는 그토록 고매한 철학적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건지.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내치듯이 가족을 보내버리는 장면은 개운치 않아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었는지 몰라도, 아내를 비롯한 가족에게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의 눈에는 제자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인간적 결점이 훤히 보였을 거야. 소크라테스는 그걸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나의 삐딱함을 향해 ‘차분한 우문현답’을 던져주신 선생님의 말투가 언제나처럼 깊고 따스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할까봐, 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두려워한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세미나를 마치며 선생님은 나에게 오래 숨겨두었던 마음을 털어놓으셨다.
“여울아, 우리 이 세미나 너무 급하게 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해가면서 진행하자꾸나.”
“네, 그럼요. 저도 천천히 더 열심히 준비해서 이 세미나를 더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나는 싱긋 웃으며 선생님을 흐뭇하게 올려다보았는데, 선생님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뭔가 안타까운 일렁임 같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선생님은 나를 따스하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여울아, 너랑 함께하는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내가 너무 오래 살면 어떡하니.”
그 순간 밑도 끝도 없는 눈물이 차올랐지만, 아픈 선생님 앞에서 도저히 울 수 없어 나는 초록빛 탁구대 위를 경쾌하게 튀어오르는 오렌지빛 탁구공처럼 더없이 발랄하게 외쳤다.
“그럼, 제가 더 좋죠. 선생님이 오래 사시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은 바로 저일걸요?”
과도하게 명랑한 내 반응에 너털웃음을 터뜨리신 뒤, 선생님은 수줍은 듯 손사래를 치시며 황급히 작별 인사를 하셨다.
나를 이해해줄 단 한 명의 친구선생님께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을 글로라도 표현하고 싶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살아서는 결코 진정한 스승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진짜 스승은 책 속에만 있거나, 영화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라고. 그만큼 저는 많이 외로웠나봅니다.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기 위해 그토록 헤맸던 시간. 어쩌면 하늘이 나에게 다정했던 옛 시절의 아버지를 빼앗아가시는 대신 선생님을 보내주신 것이 아닐까 하고 남몰래 서글퍼하던 나날도 있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잃어버린 아버지의 대체재도 아니고, 내게 한 번도 없었던 위대한 스승의 대체재도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마흔에 대한, 삶에 대한 이 미칠 듯한 두려움을 재빨리 잊게 해줄 마음의 진통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을 그저 함께 견뎌줄 친구였음을. 선생님과 ‘둘만의 향연’에 빠져 있는 시간만큼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커다란 두려움을 초연하게 이겨내시는 선생님과 함께하니 정말 무서울 게 없었지요. 그러니 선생님, 더 오래오래, 제 머리카락이 온통 흰머리로 뒤덮일 때까지, 저와 함께 ‘끝나지 않는 향연’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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