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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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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대체재란 없다

보상심리의 덧없음을 깨달을 때…

‘지는 것’은 괜찮지만 싸움을 포기하지는 말자!
등록 2017-12-01 03:11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자꾸만 잊는다. 욕망의 대체재란 없다는 것을. 그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다른 그 무엇으로 그리움을 보상받으려 하면 오히려 그리움은 더 거대한 눈사태가 되어 뒤통수를 친다는 것을. 한낮에 눈물 쏙 빠지게 매운 떡볶이를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맛은 없고 몸에만 좋은 샐러드를 먹으면, 밤에는 떡볶이보다 훨씬 더 맵고 더 짜디짠 짬뽕국물을 찾게 된다는 것을.

보상심리는 백전백패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열망을 참아내며 안정된 직장인의 길을 택한 사람은 언젠가는 그토록 독한 마음을 먹고 팔아치웠던 피아노를 어떤 식으로든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보상심리는 백전백패다. 보상심리는 A를 갖지 못해 B로 대신하려는 마음이다. 그런데 A를 원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B를 욕망의 대체제로 삼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토록 원했던 A를 향한 애틋함과 동경이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진짜 원하는 A를 손에 넣지 못하는 나 자신이 더욱 못마땅해진다. 그토록 갈망하는 A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 더욱 안타깝고 원망스러워진다. B는 A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 B는 절대로 A 비슷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상심리와 대체재 찾기를 멈추지 못한다. B가 A를 대신할 수 없음을 엄연히 알면서도, 그 길이 아닌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리만족과 순간의 충족감도 쾌락의 일종이니까.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여행책만 읽다보면 오히려 진짜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 스트레스가 쌓일 때도 있고, 4살 재롱둥이 조카를 지금 당장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조카 사진을 보고 있으면 오히려 더욱 조카 얼굴이 보고 싶어 영상통화 버튼을 누르게 된다. 미친 듯이 바다를 보고 싶을 때, 한 번도 간 적 없는 머나먼 이국의 푸른 바다 사진을 노트북 바탕 화면에 깔아놓으면, 어느 정도 갈급함이 가라앉다가도 결국 바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진다.

이런 일상 속 순간적인 열망보다 더 결정적인 보상심리의 메커니즘이 있다. 바로 ‘내가 진짜 원하는 일’에 대한 보상심리다. 나는 지난 15년 동안 문학연구자에서 문학평론가로, 문학평론가에서 작가로 변신해온 과정 자체가 ‘보상심리의 오작동’ 때문임을 마흔 즈음에 깨닫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글 쓰는 일’이라는 점에서 셋 다 비슷하겠지만, 사실 세 일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문학연구자는 ‘나’라는 주어와 ‘감정’을 감추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글을 써야 하고, 문학평론가는 ‘나의 글’이라기보다 ‘타인의 글’에 대한 비평적 글쓰기에서 희열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는 훌륭한 문학연구자와 문학평론가도 꼭 필요하지만, 나는 그런 재목이 아니었다. 나는 두 일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찾지 못했다. ‘닥치고, 나의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을 늘 품어왔으면서도 스스로를 속였다. 그토록 원하던 작가의 길로 곧바로 도전하지 못하고 문학연구자나 문학평론가의 길에 만족하려 했던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나의 이야기를 과연 누가 읽어줄까’라는 자격지심이 가로놓여 있었다.

‘인생’이란 경기장의 법칙

보상심리의 오작동은 꽤 복잡한 과정으로 나타난다. 보상심리를 발현하는 동안에도 자꾸만 ‘나는 괜찮다, 충분히 열심히 하고, 게다가 잘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기위안을 삼는 것이다. 문학연구자로 살아갈 때 ‘나’라는 주어나 ‘감정’의 표현을 모두 빼고 건조하고 객관적으로만 써야 하는 논문의 글쓰기 방식에 나를 끼워맞출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얼른 ‘작가의 길’로 직진할 생각을 못하고, ‘나는 작가가 될 소질이 부족하니, 좀더 노력해서 성실한 연구자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소극적인 보상심리로 일관했다. 꾸밈없이 원하는 길에 다가가는 느린 과정이긴 했으나, 좀더 일찍 나 자신에게 솔직했다면, 좀더 일찍 평론가나 연구자가 아닌 ‘작가’의 길에 맨몸으로 돌진했다면, 무려 15년이라는 방황의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방황으로 얻은 것도 있었지만 잃은 것이 훨씬 많았다. 20대 때 지녔던 감성으로 평론이 아닌 그냥 ‘내 글’을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시절의 생생한 감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대의 처절함, 그 나이만의 싱그러움, 절박함, 천진함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감성이었고, 나는 그때 ‘진짜 나의 글’을 쓰지 못한 상실감을 평생 가슴에 지닌 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인생을 향해 직진하지 못한 보상심리의 쓰라린 형벌이 아닐까.

내 끈덕진 보상심리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속에는 분명 나에게 소중한 ‘도약’의 순간이 있었다. 문학연구자에서 문학평론가가 되는 것 사이에도 엄청난 도약이 필요했고, 문학평론가에서 작가가 되는 것 사이에는 더 큰 도약이 있었다. 문학평론가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문학평론가가 작가로 변신하는 것은 그보다 수백 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지금 내가 쓰는 글’과 앞으로 내가 ‘10년쯤 뒤 꼭 쓰고 싶은 글’ 사이에도 엄청난 도약이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공으로는 쓸 수 없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취재하고 공부하고 느끼고 살아내야만 쓸 수 있는 ‘미래의 글’을 쓰기 위해, 더 나은 작가가 되려면 지금까지 경험한 내면의 도약보다 수천 배는 더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의 눈부신 비상’이 숨어 있을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이젠 내가 도약을 두려워하기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는 점이다. 이런 내면의 도약에는 오직 ‘올인’만이 허용된다. 다른 판돈은 아예 받아주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경기장의 법칙이다. 대리만족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내가 진짜 원하는 그것’만을 추구하려면 인생을 건 모험, 올인밖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 이 경기장에 올인하는 순간, 나와 진짜 한판 승부를 시작하는 순간에는,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행복보다 깊고 아름다운 희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진짜 원하는 길을 걸어가는 순간엔 오직 나만이 경기의 법칙과 경기의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희열로 인해 타인의 비판도, 경기장 바깥의 시끌벅적한 탁상공론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온갖 두려움과 수치심과 모멸감을 참아내고 마침내 올인했으니까. 나를 진심으로 아끼지 않는 사람들, 올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경기의 법칙을 비평할 권리가 없으니까.

‘진짜 나’를 찾아가는 길

사람들은 나에게 ‘젊은 나이에 책을 많이 썼다’고 하고, ‘너무 다작인 거 아니냐’는 비판도 한다. 인정한다. 그런데 나는 멈출 수 없다. 매 순간 한권 한권의 책을 쓸 뿐 ‘다작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다. ‘다작’에 묻은 부정적 뉘앙스를 알지만, 남들이 아무리 뭐라 해도 멈출 수 없는 것, 그것이 진정 원하는 내 모습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들은 다작을 비판하기는커녕 책이 나올 때마다 진심으로 ‘고생했다’ ‘애썼다’고 말해준다. 앞으로 써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으니 몸 좀 챙기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나의 모자람조차 헤아려주는 따뜻한 말이 참으로 고맙고 눈물겹다. 나이에 비해서는 다작일 수 있지만 책이 나올 때마다 최선을 다했고, 신간이 나올 때마다 지난번보다 더 높은 절벽에서 나 홀로 끝도 없이 추락하는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내가 ‘소심한 관찰자’에서 점점 ‘겁 없는 전사’로 변해가는 이유는 수많은 실패를 딛고도 오히려 더욱 ‘진짜 나 자신’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온갖 ‘눈치 문화’에 길들어가면서, 유행과 대세와 ‘남들이 다 하는 것’에 대한 압박감에 짓눌려, 오랫동안 ‘진짜 나’의 목소리를 숨기며 살아왔다. 이제는 소심한 사회성의 가면 뒤에 숨지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예의 바르게 거절하는 훈련을 하면서 ‘진짜 나’를 찾아가고 있다. ‘정말 부끄럽고 뒤탈이 걱정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체면을 벗어던지는 일도 잦아졌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때마다 내 잘못도 아닌데 미안한 생각이 들고, ‘죄송하지만 그런 행동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지만, 그 진땀 나는 순간을 견뎌낼 때마다 ‘더 나다운 나’ ‘좀더 스스로에게 정직해진 나’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괜찮은 나’로 바뀐 자신을 발견한다.

나를 살찌운 실패의 노하우

나는 원래 잘 지기는 해도 싸움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무식한 전사였다. 다음 싸움이 다가올 때는, 방금 전에 처절하게 깨졌던 사실도 잊어버리는 못 말리는 무식함이 있었다. 그 무지함이 작지만 소중한 내 용기의 본질이었다. 나는 승률을 계산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사랑받는지도 모른다. 계산의 ‘계’(計)자도, 효율성의 ‘효’(效)자도 싫어한다. 미치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셈법’을 동원하기는 싫다. 나는 이런 내 용감함과 무식함을 사랑한다. 나에게는 성공보다 실패의 노하우가 훨씬 많다. 나를 진정으로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성공의 노하우가 아니라 실패의 노하우다. 성공의 노하우는 남들에게서도 배울 수 있고, 어차피 두 번 이상 통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실패의 노하우’는 오직 실패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삶의 처절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실패의 노하우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오기’가 아니라 ‘실패하고도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언제든 패배할 준비가 돼 있지만, 싸움을 두려워하는 비굴한 관찰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패배보다 더 무서운 건 싸움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니까. 실패보다 더 두려운 건 내가 꿈꾸는 더 나은 나, 내가 살아가고 싶은 더 아름다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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