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술 끊을 거야. 살이 너무 쪘어. 다시는 술 안 마실 테니 그리 알아.”
지난 토요일 오전, 와잎이 선언했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제정신이니? 아직 술 안 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와잎을 안 지 20여 년, 금주 선언은 처음(이라 쓰려니까 살짝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와잎은 4차까지 달린 뒤 녹색 피를 토하면서도 다음날 아침 해장술을 먹던 비타협주의자였다. 술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책을 찢으라”며 나무라던 근본주의자였다. “인생 음주와 대리밖에 없다”며 모두를 고르게 취하게 만드는 박애주의자이자 “술 마시는 것처럼 공부했으면 서울대에 갔을 거”라며 자아비판도 하던 객관주의자였다. 그런 와잎이 자발적 금주를 외치다니.
확인사살이 필요했다. “자기가 술을 끊는다고? 똥파리가 똥을 끊고 모기가 피를 끊는다고 하지, 왜?”라고 도발했다. 와잎은 “똥파리 똥 싸는 소리 하고 앉았네~. 두고 봐~”라며 “내가 한다면 또 무섭게 하는 스타일인 거 알지?”라고 눈을 부라렸다. 그지 알지~. 한다면 아주 무섭게 하지~. 음주도 하면 무섭게 하시고 쇼핑도 하면 무섭게 하시고~. 난 마음 바뀌기 전에 각서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증이라도 받아두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걸 보니 며칠은 안 마시겠거니 안도감이 들었다. 저녁 무렵, 와잎은 아들 녀석의 친구인 쌍둥이네 부부의 전화를 받았다. 쌍둥이 아빠는 사고가 날까봐 애들 놀이동산 가는 것도 마다하는 안전제일주의자. 비행기 타면 혹시 사고 날지 모른다고 제주도 여행도 안 가는 인물(본인은 오사카와 제주도 출장으로 잘도 다녀오더라는). 밖에서 술 마시면 위험하니까 주로 자기 집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하던 그가 어인 일로 동네 술집으로 걸음을 한다고 하더라는 것. 술 끊었다는 와잎의 말에 쌍둥이 엄마 유리씨는 언니는 안주만 먹으라며 되도 않는 미끼를 던졌다. 와잎은 “그럴까?” 하며 나갈 채비를 했다. 배반의 시간이 닥쳐오고 있었다.
쌍둥이네 가족과 우리 가족은 1차로 동네 호프집인 용구비어로 자리를 잡았다. 와잎은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베이컨감자튀김과 오뎅탕, 핫윙에 소주와 생맥주를 주문했다. 외웠니? 아주 빅피처(큰 그림)를 그리는구나. 쌍둥이와 아들 녀석은 휴대전화를 들고 옆자리에서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와잎은 “이게 얼마 만의 외출이냐”며 호시탐탐 때를 노렸다. 쌍둥이 아빠는 “오늘만 마시고 낼부터 끊으라”며 와잎을 유혹했다. ‘기린 이치방’ 생맥주 출시 포스터를 본 와잎은 갑자기 “이건 반드시 마셔야 한다”며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어제도 마시지 않았니? 그럼 그렇지~. 쌍둥이 아빠는 “이렇게 술 잘 마시는 부인이랑 사니까 얼마나 좋으냐”고 추임새를 넣었다. 본인 일이 아니라고 막말을 하시는구만~. 한번 살아보시죠~.
안전 제일 쌍둥이 아빠는 전쟁 위험이 심상치 않다며 만약 전쟁이 터지면 무조건 7호선 숭실대입구역으로 피란을 가라고 했다. 서울지하철역 가운데 가장 깊어서 다른 곳보다 안전하다고 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온전하겠니? 와잎은 전쟁 나면 자기는 그냥 마지막 술 한잔을 마시겠다고 말했다. 장하다~. 이윽고 와잎과 쌍둥이 아빠는 “인생 뭐 있냐, 마시자”고 잔을 들었다. 전쟁이구만~. 2차 ‘호치킨’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자정께 끝이 났다. 숭실대입구로 피란 가고 싶던 난 절규했다. “니들이 더 위험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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