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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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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마귀들과 싸울지라

돼지갈비 유명한 경기도 광명 ‘아리랑참숯불구이’
등록 2017-09-15 22:55 수정 2020-05-03 04:28
아리랑 제공

아리랑 제공

막내딸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를 못했다. 많이 배운 네가 가려서 읽도록 해라. 네게 편지는 처음 쓰는구나. 아들 녀석에게도 편지는 쓰지 않았다. 딸 여섯을 놓고 마흔둘에 어렵사리 본 아들이지만 한번도 대놓고 편애하지 않았다. 녀석이 삐뚤어질까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건 딸들에 대한 예의였다. 남몰래 탕국에 고기를 더 얹어주는 것으로 족했다. 편지는 낯간지러워 엄두도 못 냈다. 물론 지금도 나를 웃게 하는 건 딸들이다. 사내놈들은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시누이가 여섯이나 되는 집에 철부지 남편만 보고 시집온 너를 난 막내딸로 삼았다. 8남매의 장남에게 시집간 스물 무렵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명절날 시어머니는 음식 장만하느라 버선발로 다니던 내게 눈깔사탕이나 약과 같은 주전부리를 쥐어주곤 했다. 나도 명절날 전 부칠 적에 맛이 어떠냐 네 입에 먼저 넣어주곤 했다. 자식에게도 설거지 거들라고 일렀다. 니 성에는 차지 않았을 거다. 서운한 게 있다면 용서해라.

딸아. 얼마 전 구역예배 하는데 교회 김 집사님이 전화기를 들고 보여주며 그러더라. 아드님이 쓴 책인데 알고 계셨냐고. 눈이 침침해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시깽이라는 책이었다. 녀석이 책을 냈다는 걸 난 까맣게 몰랐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지 대번 알았다. 너와 녀석의 술 먹은 일들이 담겼다고 책 소개에 나와 있더구나. 얼핏 보니까 술 마시고 토하고 술을 먹이는 어지러운 글인 것 같더구나. 어떤 글은 술을 주님이라 빗대기도 했더구나. 녀석이 아주 사탄에 씌었지 뭐냐. 사실 명절날 와서 맥주 한잔씩 마시는 건 봤어도 이렇게 술을 먹는 줄은 몰랐다.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다. 하긴 아침에 일어나면 현관 입구에 술병이 나뒹구는 걸 보고 녀석이 밤새 매형과 먹었거니 했다. 주여.

김 집사님과 구역 식구들은 아드님이 책도 내고 좋겠다 했지만 얼굴에는 민망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난 이런 것도 책으로 내나 한심해서 그냥 웃는 척했다. 김 집사를 보내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찬송가도 불렀다. 주님께 기도도 올렸다.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난 주말 내 생일이라고 너희가 손주와 왔다. 시누이 소개로 경기도 광명 아리랑이란 음식점에 돼지갈비를 먹으러 갔다. 소갈비를 시키려는 녀석을 간신히 말렸다. 소갈비가 얼만데. 녀석이 구워줘서 그런 걸까, 양념이 적당해 맛이 나쁘지 않았다. 나도 영락없는 에미다. 명이나물이랑 동치미 등 밑반찬도 정갈했다. 뼈에서 나는 노린내만 빼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날 난, 너와 녀석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네가 녀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구나. 약속이나 한 듯 녀석은 곧바로 소주 1병에 맥주 2병을 시키더구나. 너희는 주거니 받거니 잘도 마셨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집에 와 기도를 올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둘은 천생연분이니라. 그 순간 너희가 술을 먹는 것도 주님이 뜻한 바 있어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청컨대 녀석이랑 교회 좀 잘 나가거라. 세상일은 인력으로 안 되는 것이 많다. 교회 가서 술 끊은 사람 부지기수다. 녀석 편에 돈 좀 보냈다. 안주 챙겨가며 마시거라. 속 버린다.

-엄마가 xrepoter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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