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황동혁 감독의 영화 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소설가 김훈이 2007년 써낸 이 문장이 아닐까 한다. 김훈은 이 문장 뒤에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탰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영화 은 소설 을 최대한 영상으로 옮기려 했다. 영화를 만든 황 감독은 과의 인터뷰에서 “ 소설 속 장면들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솟구치더라.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서로 뱉어내는 한마디 한마디가 처절하고 치열하게 느껴졌다. 그 논쟁에 매료돼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 의 흠결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백성 아닌 명나라 생각한 김상헌</font></font>소설과 동명의 영화 은 모두 병자호란이 진행된 47일간의 기록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1636년 병자년 12월14일, 열흘여 만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성까지 질주해온 청의 기마부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고립과 추위와 패배의 시간을 견디다 이듬해 1월30일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였다. 조선의 왕 인조는 항복 문서와 함께 성에서 나와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이 과정에서 삶, 생존, 종사의 유지를 위해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론자 최명길과 ‘오랑캐에게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며 청과의 결전을 주장한 척화론자 김상헌이 치열한 말의 대결을 펼친다. 영화는 두 인물의 말의 대결로 시종일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병자호란’을 다뤄온 기존 작품들과 가장 다른 점은 김상헌과 왕 인조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론자(청과의 화친을 주장)를 현실을 냉철하고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한 인물들로 높게 평가했다. 반면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론자는 ‘명나라와 맺은 군신관계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 명분주의자라고 인식해왔다.
김훈은 소설에서 척화론자 김상헌에게 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김훈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속 김상헌은 책상머리에서 책이나 읽는 문약한 선비가 아니라, 충절이라는 가치를 중히 여기면서도 민중의 고통에 공감하는 강직하고 곧은 사대부이다. 이런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뱃사공의 손녀 나루와 신분은 낮지만 지혜로운 대장장이 서날쇠(고수 역)가 투입된다. 김상헌은 왕을 따라 뒤늦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가난한 뱃사공의 목을 단칼에 벤다. 향후 그가 청나라 군대에 언 강의 길을 안내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 칼질에는 비장미가 서려 있다. 병사들의 추위를 걱정해 가마니를 사용하게 하고, 신분은 낮지만 현명한 날쇠를 신뢰하고 그에게 중책을 맡긴다. 김상헌의 비장미는 왕이 청에 항복하며 머리를 조아릴 때,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하면서 완성된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죽고 강간당한 50만 조선 피로인</font></font>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판타지에 불과하다. 김상헌은 왕이 항복을 약속할 때 6일 동안 곡기를 끊은 뒤 자살을 시도하긴 했다. 그러나 칼로 배를 찌르는 할복이 아닌, 옆에 사람을 두고 목을 매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자결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상헌은 명분과 죽음을 바꾸지 않았다. 등을 쓴 한명기 명지대 교수(국사학)는 “김상헌은 김훈 소설에서와 달리 비쩍 마른 사람으로 추정된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백성이나 조선의 임금보다는 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 등 명에 대한 은혜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가 묘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 속 인조의 모습 역시 실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인조는 실패한 왕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왕이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조는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왕이 버리고 떠난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모두 불타 성하지 않았다. 또 거리 이곳저곳에서 주검이 나뒹굴었다. 특히 병자호란의 가장 큰 비극은 청으로 끌려간 50만~60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로인(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의 존재였다. 청은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탈출하다 붙잡히면, 죽이거나 발뒤꿈치를 잘랐다. 을 쓴 나만갑은 “조선인 피로인이 무언가를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퇴로 때려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다”고 썼다. 여성 피로인의 고통은 더했다. 사로잡힌 뒤 강간당했고, 저항하다 죽임을 당했다. 청군 장수에게 사로잡힌 여성 피로인은 장수의 계급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윤간을 당했다.
이런 고통을 유발한 조선의 최고 통치자가 인조였다. 한명기 교수는 “인조는 병자호란의 와중에 여러 번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도성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면 빨리 해야 했는데 미적대다 원래 가려던 강화도에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갔다. 이미 9년 전 정묘호란을 겪어놓고도 정권 보위에 급급해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준비 없이 맞이한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다”고 지적했다.
이에 견줘 영화 은 인조의 고통을 받아안으려는 작품이다.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마지막 장에서 인조가 항복 절차인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장면은 처절하고도 우아하게 그려진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영화를 본 뒤 “이토록 우아한 패배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왕이 무릎 꿇고 흙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흙냄새를 맡는 모습을 보며 관객은 왕의 고통을 느낀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도 “김훈 작가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순간 백성들이 도열해서 울 때 어버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우리가 왜 민중을 고통에 빠뜨린 왕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나”라며 비판했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인조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나</font></font>김훈은 그동안 패배한 남성들에게 비장한 역사적 서사를 부여해왔다. 문화연구자 오혜진은 책 에 실은 글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에서 같은 김훈의 장편 남성 서사를 분석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등장한 장편 남성 서사는 ‘역사의 피해자’라는 운명의 형식을 불가피하면서도 특권적인 것으로 승인·정당화하고자 하는 남성 주체의 정치적 욕망 및 무의식을 반영한 역사적 장르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한 남성 주체에게 역사적 맥락을 부여해온 것이 김훈의 같은 장편소설이다.
도 이런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김훈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 역사를 만들어온 남성 주체들조차 백성과 함께 살기 위해 고뇌하며 흙바닥에 머리를 비볐음을 강조한다. 류진희 성균관대 강사(한국학)는 이에 대해 “전쟁 이후 50만 명이 넘는 민중이 피로인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통을 겪었다. 은 그런 내용을 거세한 채, 척화파로 대표되는 김상헌의 충절과 고뇌를 생각하게 한다. 실패한 왕 인조에게도 민중의 삶을 건지기 위해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감수했다는 서사를 부여한다. 모든 남성 역사 주체에게 ‘그럴 만했다’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진실로 고통받은 자 누구인가 </font></font>김훈은 소설에서 “나는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병자호란 이후 진실로 고통받은 자는 누구였는가. 왕 인조인가, 아니면 인조의 무수한 정치적 실패와 무책임으로 인해 전쟁 중 죽고 청에 끌려가 고통당한 민중인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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