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끊기자 온 동네가 암흑천지가 됐다. 아내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있는 일”이라며 능숙하게 책상 위에 놓인 초에 불을 붙였다. 도담이가 태어나기 전, 안식월 휴가를 쓰고 아내가 유학하던 코스타리카에 갔을 때 일이다.
그해 코스타리카에선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기와 수도가 끊겼다. 중남미에 위치한 코스타리카는 인구 490만 명의 작은 나라다. 군대가 없고, 질 좋은 커피의 원산지인데다, 국립공원이 국토의 25%에 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환경 피해를 최소화하며 자연을 즐기는 에코투어로 전세계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참, 나무늘보(!)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내가 갔던 2016년은 코스타리카에 특별한 해였다. 정부가 석유·석탄 같은 화석연료나 원자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수력·풍력·태양광 등 100% 재생에너지로만 정부·기업 활동은 물론 국민 생활까지 지탱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이를 위해 무려 9500만여달러에 이르는 예산을 투입해 신규 수력·풍력·지열 발전소를 짓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같은 도전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나라에도 100만 대에 달하는 가솔린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고, 석유 사용량이 다른 남미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재생에너지로 국가의 전력 수요를 100% 충당하기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럼에도 코스타리카 정부가 이 만만치 않은 실험에 도전한 것은 “장기적으로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재생에너지에만 의존하는 생활을 고집한 탓에 전기와 수도 공급이 불안정해졌고, 그러다보니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이 상당히 컸다. 아내는 아침에 수도가 끊겨 걸핏하면 제대로 씻지 못한 채 학교에 가야 했고, 나 또한 볼일 보고 물을 내리지 못해 화장실 안에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환한 대낮 같은 서울과 달리 코스타리카는 가로등 수가 많지 않을뿐더러, 특정 장소와 시간을 제외하면 도시 전체가 소등에 돌입한다. 성격 급한 한국 사람이라면 당장 한국전력이나 상수도사업본부에 전화해 따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태도였다. 이들은 에너지 절약 때문에 발생하는 일상의 불편들을 그렇게 큰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푸라 비다’(Pura Vida·걱정 없고 자연을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의미의 코스타리카 인사)를 삶의 목표로 실천하는 이들이 원래 낙천적 성향이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경제 규모도 기후 조건도 다른 한국이 갑자기 탈핵 선언을 하고 코스타리카 수준으로 에너지를 절약하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유독 무더웠던 여름의 어느 날, 성미산 마을 어린이들은 북극곰을 살리기 위해선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한다는 수업을 듣고 집에 와서 에어컨을 껐다. 퇴근한 아빠들은 에어컨이 없는 열대야를 견디지 못하고 동네 맥줏집으로 피신했다나. 도담이가 자라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나는 도담이의 의견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리모컨을 빼앗아 시원한 바람을 맞을 것인가. 이 질문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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