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책방을 체험하다
② 지역을 살리다
‘소심한 책방’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9월13일 오후, 제주시 애월읍에서 출발한 차는 1시간40분을 달려 동쪽 끝 구좌읍 종달리에 당도했다. 신작로 옆으론 펜션 공사가 한창이었다. 인적 드문 전형적인 어촌마을이었다. 이런 곳에 책방이 있다니 소심한 책방이 아니라 ‘담대한’ 책방이라 불릴 만했다.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에 옅은 노란색 단층 건물이 보였다. 딱 동네 구멍가게 크기였다.
10대부터 50대까지 함께한 자리책방에 들어섰다. 소설 등 단행본부터 독립출판물, 팝업북과 동화책 등 종류와 권수는 많지 않았지만, 주인장의 편애를 받은 책들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장인애 대표는 “제주의 작은 시골마을에 책방을 내기로 결심한 뒤에도 ‘과연 이곳까지 누가 찾아오기는 할까?’ 하는 소심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며 “그 마음을 이름에 담았다”고 했다. 2014년 5월 책방을 열기 전까지 동업자인 장 대표와 현미라 대표는 서울 생활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각자 운영하던 블로그에 쓴 글을 통해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모르던 사이였다. 무엇에 이끌리듯 제주에 그것도 아주 외진 마을에 서점을 낸 이유가 궁금했다. “서로에게 책이, 텍스트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행여나 책방이 망하면 ‘우리가 좋아서 골라놓은 책이니 둘이 나눠 갖지, 뭐’ 하는 핑계를 위로로 삼았어요.” 현 대표의 말이다. 이쯤 되면 무모한 책방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날 저녁, (무모한) 책방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로 북적였다. ‘동네서점과 함께하는 한겨레21 독자와의 간담회’(독자 간담회) 첫 회가 여기서 열린 까닭이었다. 정기독자들을 비롯해 단골과 지역 주민 30여 명이 자리했다. 처음 서점을 방문한 이들은 소소한 책방이 주는 살뜰한 분위기에 매료된 듯했다. 제주의 ‘힙 플레이스’가 되는 탓에 “우연히 발견한 책방이 편안하고 따스한 곳이라 누구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곳이 된다면 좋겠다”는 장 대표의 바람은 이뤄지기 어려워 보였다.
작은 책방이 주는 친밀감 때문이었을까, ‘웃기고 자빠진 글쓰기’를 주제로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강연은 유독 정겹고 유쾌했다. 글쓰기가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진 것이라는 얘기를 다양한 예문과 함께 나누는 동안, 1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제주 시민은 때론 웃고 때론 박수치며 호응했다.
9월20일, 두 번째 독자 간담회가 열린 부산 백년어서원(百年魚書院)은 2008년 시인이자 작가인 김수우 대표가 중구 동광동 원도심에 문을 연 인문학 운동의 상징적 공간이다. 백년어는 앞으로 백 년을 헤엄쳐 갈, 백 마리의 나무 물고기를 뜻한다. 실제 서점 안에는 땔감으로 쓰일 나무를 깎아 만든 물고기 100마리가 진·선·미 등 하나하나의 가치를 새긴 채 걸려 있다. 백년어서원에서는 ‘인문학 깊이 읽기’ ‘주말 문화 읽기’ ‘번개 특강’ ‘저자와의 만남’ ‘낭독의 밤’ 등 문화행사가 무시로 열린다. 계간지 도 발간하는 서원은 지역 문화운동의 거점 노릇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원도심인 중구 일대에 예술인들의 창작 및 거주 공간을 마련해 무상 대여해주는 ‘또따또가(街)’ 사업을 2010년부터 주도적으로 벌이고 있다. 그는 “또따또가는 관용·배려·다양성 등의 의미를 담은 프랑스어 ‘똘레랑스’(Tolérance)에서 ‘또’를, 예술가와 시민들이 ‘따로 또 같이’ 모여 문화를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따또’를, 거리에서 문화를 나눈다는 뜻에서 거리 ‘가’자를 넣어 만든 말”이라며 “열린 공간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예술공동체를 지향한다”고 했다. 백년어서원으로 인해 죽어가던 원도심이 되살아났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날 저녁, 백년어서원에는 50여 명의 지역 독자와 시민이 함께했다. 좁은 좌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백년어서원의 단골답게 수준이 높았다.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한겨레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을 하기도 했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의 경우 다양한 문화행사가 여전히 부족한 현실과 한겨레에 대한 여전한 지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서원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김 대표는 차와 다과를 무료로 대접했다. “돈이 되지 않아도 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김 대표의 실험은 10년 가까이 실패하지 않았다.
“돈 안 돼도 안 망할 수 있다”부산에 백년어서원이 있다면 전북 전주에는 ‘조지 오웰의 혜안’이 있다. ‘힙 플레이스’로 뜨는 서학동 예술인 마을 초입에 있는 특이한 이름의 이 책방은, 주인장의 고집을 드러내듯 ‘인문학 전문서점’을 간판에 내걸고 있다. 2014년 1월 문을 연 뒤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전주 지역 문화 거점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서점에선 부정기적으로 저자를 초청한 ‘북콘서트’가 열리고 지역 주민을 한데 묶은 독서 토론 모임도 진행 중이다.
책방 주인 조정란(42)씨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뒤 4년 동안 프랑스에 거주했다. 이 기간에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녔다. 조씨는 “프랑스에 살았을 때 런던이나 파리 같은 유럽 도시의 동네책방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런 서점들이 동네와 지역사회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한국에 돌아온 뒤 동네에 꼭 예쁜 책방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며 웃었다.
그런데 왜 전주 서학동이었을까. “저는 연고가 광주예요. 전주 한옥마을에 여행 왔다가 이 동네에 들렀어요. (서점에서 북쪽으로 다리 하나를 건너면 바로 한옥마을로 연결된다.) 당시 서학동이 예술인 마을로 조성 중이었거든요. 동네 분위기가 파리 뒷골목처럼 너무 예뻐서 이곳에 서점을 냈어요. 동네 분위기에 매료됐다고 할까요.” (웃음)
이곳의 특징은 서점 이름에 고스란히 표현돼 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를 통해 국가권력, 즉 ‘빅브러더’에 조종되는 미래 세계를 지적했다. 아이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성찰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책방 이름에 조지 오웰을 넣었다.
서점 문을 연 지 이제 3년6개월. 조씨는 “워낙 경제적 부분에선 기대치가 낮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점은 나름 선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책과 동네서점은 한 도시가 최소한의 품격을 유지하게 만드는 공공재다. 그 때문인지 지자체나 지역 공익단체에서 서점이 주최하는 크고 작은 문화행사에 여러 지원을 해준다. 조씨와 얘기를 나누다보니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저희 서점이 호남 최초의 동네서점입니다. 지방에서 이런 책방을 열었다는 상징성 때문인지 많은 분이 기억해주시죠.” 호남 최초의 동네책방, ‘조지 오웰의 혜안’의 건투를 빈다.
보는 책방이 아닌 공부하는 책방“너를 찾는 것이 곧 글로 이어져 만들어진, ‘검은 소설’을 나는 꿈에서 어렴풋이 봤다.” 광주의 책방 주인장이자 소설가인 김종호씨는 2000년 펴낸 첫 소설집 에 이렇게 썼다. 그래서일까. 2016년 7월 그가 광주에 문을 연 책방 이름도 ‘검은책방 흰책방’이다. 검은 책은 소설을, 흰 책은 시를 뜻한다. 검은 책은 김종호씨가, 흰 책은 김씨의 아내이자 책방을 함께 운영하는 이은경 대표의 몫이다. “책은 흰 바탕에 검은 글씨잖아요. (정영문), (오르한 파묵)처럼 작가들에게 소설이란 ‘검은’ 느낌이 아닌가 싶어요.” 이 대표는 서점에서 매달 손님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추천하는 ‘이달의 작가’ 코너를 운영한다. 9월의 작가는 알베르 카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던 5월에는 ‘고통·재난·타자’ 등을 열쇳말로 하는 책들을 추천했다.
조선대 정문 앞에 위치한 책방이라 대학생 손님이 많다. 책을 ‘보는’ 책방을 넘어, 책을 읽고 공부하는 책방으로 자리잡은 까닭이다. 매달 시나 소설 낭독회를 열고 ‘녹색평론 읽기 모임’ 등 책읽기 모임이 진행된다. 프루스트 읽기, 시각예술 읽기, 프로이트 읽기 등의 모임이 저녁마다 어두컴컴한 책방을 환히 빛낸다. 광주에는 이같은 ‘작은 책방’이 10곳 남짓 존재한다. 책방 주인장들끼리는 2주마다 한 번씩 모인다. 이 대표는 “1~2년 사이 작은 책방이 많이 늘었는데 유지나 운영이 어려운 곳이 많다”면서 “‘꾸러미 책’을 인터넷으로 판매해보자는 아이디어 등 협업을 주로 이야기한다. 책 프리마켓, 문화공연 등 광주 지역 작은 책방들이 연합한 행사를 열기도 했다”고 연대를 통한 자구책을 소개했다.
시인 기형도가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라고 부른 문향 대구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줘서 고마운 서점이 있다. 수성구 범어동에 있는 ‘물레책방’에 가면 대구가 글쟁이들의 도시라는 것이 허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 30평 규모의 서점 한 쪽에 대구 출신 문인들과 대구 지역 출판사만의 책으로 만든 코너가 있다. 장우석(42) 대표는 “처음 책방을 찾는 분들이 대구에 이렇게 글 쓰는 사람이 많았느냐며 놀란다”고 했다. 어느덧 7년, 큰 이문을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찾는 사람이 있다. 장 대표는 “문 닫지 않고 버티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4월23일 세계 ‘책의 날’에 호기롭게 책방 문을 열었다. 현실은 어려웠다. 당시 6대 광역시 중 자생한 중대형 서점이 없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독자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무대를 만들고 행사를 기획했다. 장 대표가 대학 시절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의 북클럽에서 활동한 노하우도 한몫했다. 지난 7월7일 ‘커피트럭’으로 여행하는 이담 작가의 책과 영화를 콘서트 형식으로 소개하는 행사를 열었고, 유료였는데도 서른 자리 만석에 20명 넘게 참가했다. 장 대표는 “SNS를 통해 책방을 만난 사람들이 문 닫지 않도록 도와주었다”고 고마워했다. 물레책방이 버티는 7년 동안 대구에만 10곳의 동지(복합문화공간)가 생겨났다.
황예랑 기자
하어영 기자
길윤형 편집장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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