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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 이런 고요는 처음이지?

‘힘내라! 동네책방’ 연재 첫 회… 기자, 동네책방 인턴이 되다
등록 2017-09-12 09:00 수정 2020-05-02 19:28



힘내라! 동네책방


① 책방을 체험하다


9월5일 오후 2시. 서울의 중심 남산 아래 첫 동네 용산구 해방촌을 찾았다. 해방촌 오거리와 신흥시장을 지나 주택가 골목길로 내려가자 벽돌집 앞에 ‘문학 중심 동네서점’ 입간판이 보였다. ‘여기 숨어 있었구나.’ 촘촘히 붙은 연립주택가에 자리한 ‘고요서사’. 이곳이 오늘 나의 일터다. 책방 인턴 체험. 들어는 봤나~!

골목길에서 스며드는 조잘조잘 말소리

개점 시간 오후 2시에 맞춰 기다리던 손님 5명이 서점으로 들어왔다. 서가에 꽂힌 책을 천천히 조용하게 둘러본다. “인터넷에서 보고 경기도에서 왔다”는 손님, “여기 찾느라 엄청 헤맸다” 푸념하는 손님, 책방 내부와 전경 사진만 찍고 가는 손님 등 각자 사정이 다양했다.

1차로 몰려온 손님이 떠난 뒤 고요서사를 찬찬히 둘러봤다. 3층 벽돌집 1층에 자리한 5.5평 작은 공간에 책 900여 권이 있다. 소설, 시, 에세이, 독립출판물, 문학잡지…. “맑은 날엔 햇볕이 가득 들어온다”는 창가 쪽에 책 읽는 사람을 위해 긴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 책방을 밝히는 아늑한 조명, 주인장이 쓴 손글씨 메모. 이곳저곳 책방지기의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난다.

내가 찾아간 날은 고요서사 차경희(33) 대표가 ‘반일’ 쉬는 날이다. 그는 두 달 전부터 “멀리 온 손님들이 그냥 가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마음에 매일 책방 문을 연다. 책방지기가 쉬는 날 혹은 개인 용무로 자리를 비울 때 독립출판물을 제작하는 임소라씨가 아르바이트를 한다. 서점 주인과 독립출판물 제작자로 만난 그들은 고용주와 고용인이라는 인연도 맺었다.

나와 임소라씨가 주인 없는 서점을 지켰다. 손님이 나가고 책방이 고요했다. 아, 이래서 고요서사인가. ‘어서 와, 이런 고요는 처음이지?’ 말하는 듯하다. 생소한 고요다. 책방 밖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 잘 들렸다. 개 짖는 소리,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학생들의 말소리, 택배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그래서 책방에 들른 한 손님이 블로그에 “책방 안에는 문학의 향기, 책방 밖에는 삶의 향기”가 난다고 썼나보다.

고요서사가 있는 해방촌은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 실향민이 모여 만들어진 동네다. 해방촌은 공식 지명이 아니다. 행정동은 용산동2가다. 실향 가족의 비극을 다룬 (이범선)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아직 옛 서울색을 간직한 곳이지만 이제 젊은 예술인들이 둥지를 틀면서 핫플레이스로 변하고 있다.

‘낭만적 밥벌이’는 아니지만
동네책방 ‘고요서사’에서 열리는 소설 대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옮기는 기자(왼쪽 두 번째)와 차경희 대표(왼쪽 세 번째).

동네책방 ‘고요서사’에서 열리는 소설 대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옮기는 기자(왼쪽 두 번째)와 차경희 대표(왼쪽 세 번째).

책방에 들어온 안령희(28)씨가 “김영하 작가 사인본 있나요?” 물었다. 김영하 작가의 팬인 그는 월차를 내고 경기도 화성에서 왔다. “김영하 작가가 여기서 사인회를 했다고 들어서 사인본을 사러 왔어요.” 아쉽게도 사인본은 다 나갔다. 안씨는 병원 응급실 의사 남궁인의 산문집 두 권과 평소 구매하고 싶었던 독립출판물 을 샀다. 그는 “빈티지한 느낌의 책방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웃 서점인 ‘별책부록’ 차승현 대표도 고요서사를 방문했다. 별책부록은 문화예술, 디자인 관련 책 외에 음반과 디자인 소품 등 별별 물건을 파는 책방이다. 차 대표는 “오늘은 책방이 쉬는 날이어서 잠깐 들렀다”고 말했다. 그는 “고요서사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근처 책방 주인들은 가끔 번개 만남도 하며 책방 이야기 등을 나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고요서사와 또 다른 동네서점 ‘스토리지북앤필름’과 함께 밤 12시까지 ‘해방촌의 심야책방’을 진행한다.

차 대표와 대화를 나누던 중 동네 아주머니가 “서점 앞에 장 본 물건을 맡겨도 되냐”고 불쑥 물었다. “가게에 열쇠 꾸러미를 놓고 와 찾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동네서점은 물건 맡기는 곳도 되고 어느 땐 골목에 나온 18개월 아기의 걸음마 장소가 되기도 한다.

책방에서 하는 일은 책방지기가 주문한 책을 받고, 새 책을 빈 자리에 진열하는 것이다. 손님을 맞고, 크고 작은 책방 행사도 준비한다. 물론 이것은 나 같은 초보 인턴에게 주어진 일이다. 책방 일은 더 많다. 독립출판물 제작자와 연락하고, 새 책을 주문하고,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관리도 한다. 서점에 손님이 없어도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많지 않다.

오후 5시30분 차경희 대표가 왔다. 그는 출판사 편집일을 그만두고 2015년 10월 꿈에 그리던 책방을 열었다. 이후 그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차 대표는 “출판 편집자에서 책방지기가 된 게 아니라 회사원에서 자영업자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동네책방이 ‘낭만적 밥벌이’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꼬박꼬박 한 달에 한 번 월급을 받을 수도 없고 자신이 노력한 만큼 매출을 올릴 수도 없다. 다행히 책 판매 수입과 책방 관련 행사 수입, 원고료 등을 합하면 ‘마이너스 생활’은 아니다.

책방 운영이 쉽진 않지만 이곳을 찾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게 큰 즐거움이다. “책방 행사에서 만나 결혼한 손님도 있어요. 어떤 분은 프러포즈용 책을 만들어 이곳 서가에 꽂아두고 애인에게 찾아보라고 했죠. 이곳이 프러포즈 장소가 된 거예요.” 고요서사가 의도치 않게 커플 매니저를 한 셈이다. 놓칠세라 차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도 이곳에서 인연을 만나셨나요?” “인연이오? 없어요. (웃음). 강원도 속초에 있는 동아서점 주인은 손님과 결혼했대요. 그분들처럼 책방 주인과 손님으로 만나 결혼하는 인연이 드물지 않다고 들었어요.”

야근하다 탈출한 직장인의 피난처
기자가 고요서사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독자들의 질문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었다. 허윤희 기자

기자가 고요서사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독자들의 질문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었다. 허윤희 기자

차경희 대표가 책방을 통해 손님들에게 주고 싶은 건 고요서사라는 이름에 담긴 ‘내면의 고요’다. 서점을 작은 방 서재처럼 꾸민 이유다. “지난주 단골 손님이 4개월 만에 오셨어요. 야근하다 힘들어 탈출했다고. 20분 정도 있다 갔는데 이제 살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저자 데이비드 색스는 “디지털에 둘러싸이게 될수록 우리는 좀더 촉각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경험을 갈망한다”고 했다. 고요서사에서 그 경험을 느끼는 누군가에게 이곳은 삶의 피난처인 셈이다.

“기자님, 기사 쓸 거 없는 거 아니에요?” 차 대표가 걱정하는 눈치다. 그러나 오늘 하루 10명 남짓한 손님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걱정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런 말을 건네니 차 대표가 농담을 했다. “마음의 고요 얻으라고 책방 이름을 이렇게 지었는데 친구들이 (손님이 없어) 책방이 고요하다고 해요, 하하하.”

저녁 6시30분. 이제부터 고요서사는 행사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날 저녁 7시30분부터 소설 최진영 작가와 황현경 평론가의 소설 대담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차 대표를 도와 책방을 대담장으로 바꾸기 위해 책과 의자를 옮겼다. 그리고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고요서사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으로 질문을 받았다. 나는 SNS에 올라온 질문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었다. 생각해보니 손글씨를 써본 게 오랜만이었다. 행사 때 그중 몇 명을 뽑아 책 선물을 줄 예정이다.

행사 30분 전 도착한 최예선씨는 지난해 서울 후암동으로 이사 온 뒤 일주일에 한 번씩 고요서사에 들르는 단골이다. “고요서사 공간이 아늑하고 편안해요. 그래서 산책하다 들르고, 이곳에 오기 위해 산책도 하고.” 대형서점에도 가지만 유독 동네책방을 사랑하는 이유는 “책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책을 만나는 시간이 좋아요. 이곳에서 잊고 있던 철 지난 책과 고서를 보며 예전과 지금의 번역을 비교하는 재미도 느끼고요. 이런 행사에 오면 같은 책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나 들을 수 있어 좋아요.”

작가에게도 동네책방에서 독자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최진영 작가가 작은 책방 행사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은 공간이라 독자와 가깝고 말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넓은 공간에 있을 땐 나 혼자 동떨어져 있어서 얘기하다보면 ‘내가 여기서 뭐하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공간

책방 앞 골목길이 어둑어둑해졌다. 밤 9시30분. 소설 대담 행사가 끝났다. 독자가 모두 간 뒤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했다. “탑차가 두 번 치고 간 뒤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책방 간판 전구가 깜빡깜빡거린다. ‘그래, 오늘 고생했다.’ 이제 턴오프. 그런데 난 오늘 체험인 듯 체험 같지 않은 체험을 잘한 건가. 책방 ‘체험’보다는 ‘체류’를 한 것 같은데. 어쨌든 책과 고요, 충만한 밤이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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